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혜성은 혜인이에게 전화부터 했다.
-저 도착했어요....역시 서울 공기는 별루예요...-
-혼자서 찾아 갈 수 있겠어요?? 걱정되는데.....-
-내 걱정을 혜인씨가 해주니...기분 좋은데요??
가끔 이렇게 하는 방법도 괜찮은것 같은데...음...-
-뭐라구요?? 그거 또 오사카말투죠?? 정말 내가
배우던가 해야지..못 알아먹겠잖아요...아무튼
우리집까지 무사히 가면 또 전화하세요...-
혜성은 혜인과의 통화를 끝내고선 주위를 둘러보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언제까지 왕자 노릇만 하고 있을 순 없는거야....
내 힘으로 일어서야 해...!!자..그럼 가볼까....
혜성은 시내까지 나가는 공항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서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혜인이 어느정도 가르쳐 주긴 했지만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라 약간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드디어 혜인이 알려준대로 내려서 그곳에서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리고선 또 전화를 걸었다.
-저...루이스 현이라고 합니다..-
-아..저도 거의 도착했어요...지금 택시 안인가요??
그럼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요...-
잠시후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혜성은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뭐지...? 이 느낌은....혜인씨 집에서 살게 되니 기분이 좋은건가?
이상한데......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혜성을 다희가 알아보곤 다가 왔다.
반가워요...
아..네 오래간만 입니다..신세 좀 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다 혜인이의 뜻인거죠..뭐...근데 처음 오는거 맞아요??
역시 똑똑하신 분이라 잘 찾아 오시네요..
혜인씨가 제 머리속에 지도 하나를 새겨줘서 잘 찾아 온 거예요..
두 사람 은근히 잘 맞는다니깐요...어...이러면 안되지.....
자! 가요..할머니가 지금 엄청 긴장하고 계신데요...
다희는 혜성의 짐가방을 하나 들어주면서 이야기 했다. 잠시 후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앞에서
혜성의 심장은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아...긴장 되는데요...혜인씨 집에 제가 이렇게 살게 되다니...
여기 긴장 하신 분 또 계세요...
다희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자 할머니는 손걸래를 들고 현관 앞으로 나오고 계셨다.
어..다희야..오셨니....손님....
네..어서 들어오세요...
심호흡을 하고선 혜성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할머니가 걸래를 손에서 떨어뜨리시면서 소리쳤다.
도,,동욱아....
그 소리에 다희와 혜성이 깜짝 놀랐다.
할머니...괜찮아??
두 사람이 집으로 얼른 들어왔다. 혜성이 놀라서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자 할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혜성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혜성의 얼굴을 만지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아...청심환이라도 하나 드시게 할걸....할머니...아저씨랑 완전
똑같죠?? 나도 첨에 어찌나 놀랐던지...목소리도 비슷하죠..?
할머니...정말 괜찮으십니까...?
할머니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혜성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은 차마 놓지 못하고선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의 반응에 혜성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여기 물 좀 드세요...할머니..혜성씨...아저씨 아니예요...
어? 어..그래....알았다...
할머니는 다희가 준 물컵을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는 또 다시 혜성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혜성은 그 자리에서 할머니가 잘 볼 수 있도록 할머니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하지만 물컵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할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다희는 할머니 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할머니....저 사람 동욱아저씨 아니예요...앞으로 계속 볼건데
초면에 이러시면 저 사람이 불편하잖아요..일단 좀 누워계세요..
제가 방이랑 다 알려 줄테니 쉬고 계세요..알았죠??
다희는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선 밖으로 나왔다.
놀라셨죠...그래도 정말 혜인이 아버지 많이 닮으셨어요...
그래서 혜인이가 혜성씨한테 그렇게 끌렸었나봐요...지금은
아니겠죠??
네....걱정마세요....앞으로 신세 많이 지게 됐는데..감사합니다..
아 쑥스럽게...그런 말은 그만 하시고..자 이쪽으로 오세요..
자 여기가...음 할머니가 깨끗하게 치우셨군...혜인이 방이예요..
여기다 짐 푸시고..남의 동네 오시느라 피곤하실텐데..좀 쉬세요..
저도 논문 때문에 다시 가봐야해요..아마 자주 못 뵐거예요..그러니
혜성씨가 할머니 보호자 좀 해줘요..공짜로 재워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으시죠??
혜성은 다희의 말에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방 구경을 하느라 넋을 잃고 있었다. 혜인이의 체취가 느껴지는 방에서 꼭 옆에 혜인이 있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다희는 바빠서 대충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나가버렸다. 혜성은 아프신 할머니가 은근히 걱정스러워서 일본에서 나올때 가지고 온 진정 효과가 있는 차를 꺼내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차를 끓여서 할머니 방에 노크를 조심스럽게 하고선 들어갔다. 하지만 할머니는 많이 지치셨던지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조심히 차를 놓고선 나왔다. 그리고 다시 혜인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예요??-
-좀 전에 집에 도착했어요..지금 혜인씨 방이예요..-
-아 정말...얼마나 걱정했는데요..도착하면 바로 전화 달라니깐...-
-그것봐요..얼마나 걱정하는지 이제 알겠죠? 혜인씨도 제발
내가 걱정 좀 안 하도록 해요...-
-알았어요....피곤하시죠?? 이제 좀 쉬세요..-
-혜인씨 방 좀 더 구경하구요...-
-볼 것 아무것도 없는데....-
-걱정 말아요..저 아무거나 뒤지진 않을테니깐요...-
그렇게 둘은 간단히 통화를 끝냈다. 여전히 혜성의 눈에는 혜인의 방이 천국이었다.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작은 유리 장식장 안의 낯익은 상자를 보게 되었다.
이건...정말 똑같은데...열쇠가 하나만 꽂혀 있네? 설마...아니겠지...
혜성은 어머니가 잃어버린 그 상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잠깐동안 해봤지만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선 긴장이 풀렸는지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초면에 주방에 들어가서 뭔가를 만들기는 좀 그랬지만 할머니도 곤히 주무시는데 깨우기도 그렇고 해서 주방에 있는 재료들로 점심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잠시후 할머니가 깨어나셔서 주방으로 오셨다.
아이구..어쩐담...손님 대접을 못 해 드리고 이 늙은이가...
아닙니다..할머니 그냥 혜인씨처럼 대해 주세요...손님은
부담스럽습니다...할머니 아직 점심 안드셨죠..저랑 같이
드세요...
그리고는 자신이 만든 음식들을 식탁에 놓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랬다.
아니 젊은 양반이 어떻게 이렇게 음식도 잘 만드실까....
일본에서 태어나서 살았다면서 어찌 한국음식을 이렇게
잘 아실까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집에선 절대로 일본 음식 안 드셨어요..
일본말도 절대로 허락 안하셨구요..맛 좀 봐주세요...
혜성은 다정스럽게 할머니께 음식을 드렸다.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 생각나서 목이 메어왔다.
음.....간이 딱 맞네요..정말 음식 잘 만드시네요...그런데
아버지가 안 계신다구요...돌아가신건가요??
아니예요...지금 한국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실지도 몰라요...
네에?? 같이 사신게 아닌가요??
전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그냥 저와 어머니를 버리셨다는것만...
죄송합니다...괜한걸 물어서...
아닙니다..저도 혜인씨에게 들어서 압니다..제가 할머니 아드님과
그렇게 많이 닮았나요?
혜인이가 좋아할 만 해요....혜인이가 어찌나 아빠를 잘 따랐는지..
지금 혜성씨 행동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 제 가슴에 절절하니..
할머니는 또 다시 말을 잇지 못하시곤 식탁 의자에 앉으셨다.
할머니..저 그렇게 부르시면 제가 싫어요...그냥 혜인씨와 똑같이
해주세요...저도 그렇게 할머니가 불러주시는거 듣고 싶어요...
어찌 초면에...차츰 그렇게 할께요...
둘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