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야....!!
승희야...잘 왔어....정말...!!
필리핀 공항에서 두 사람은 반가운 재회를 했다.
고마워...그리고 미안했어...그래서..내가 여기서 너에게 잘못했던 것 다 보상해줄께....
권선징악이라는 단어를 뼈져리게 느낀 듯 독기가 가득했던 승희의 눈빛도 이젠 20대의 활발한 아가씨 평범 그 자체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과 아버지가 민아와 강이사에게 잘못했던 마음을 뉘우친 듯 민아의 두 손을 잡으며 용서를 빌었다.
야~~!! 그런 소리 하지 마...나도 날 잘 알아...그래도 내 곁에 있어준 건 너밖에 없어...
아참...유리는 어떻게 됐는지 소식 알아?
승희의 마음을 잘 아는 듯 미소를 짓는 민아 역시 메리어트를 등에 업고 천방지축으로 날뛰어 다니던 철없던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한창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는 아가씨일뿐...
명신은 문 닫고...거기 터가 별루 안 좋았나 봐...우리도 그랬고 명신도 그렇게 됐고...
아마 거기 철거하고 다른 건물 들어설건가 봐...그리고..유리는....선택하라고 했나 봐..
일본에서 교도소에 들어갈건지 아님 다신 일본 땅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던가.....
세상에.....그래서?
엄마하고 일본 떠났다고 하던데....그 뒤론....나도 모르겠어....
승희야...넌 괜찮아? 백화점이...
말끝을 흐리는 승희가 걱정이 된 듯 민아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한국에 대한 미련 따윈 모두 그 곳에 버리고 온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오히려 민아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응...내가 말했잖아...거기 터가 안 좋았다고...나 다 버리고 왔어...너처럼....나 이제 그레이스
공주 아니야...여기서 다시 시작할거야....
그래....우린 잠시 인생에 착오가 있었을 뿐이야....우리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아...걱정 하지마....!! 엄마는 레스토랑에 관심도 없어...그냥 울 엄마가 뭐라 하면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려..
하지만...
어머? 천하의 김승희가? 왜 이러셔? 우리 비록 지금 꼴은 말이 아니지만...고개만큼은 꼿꼿이 들자...!!
우리 자존심이잖아...그리고 나나 우리 아빠나 너 같은 경영인이 필요해 지금은....꼭!!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빠가 필리핀에 와서부터 화이트 와인 제조하고 계시는데 그게 올해 처음으로 출시하게
됐거든....아무래도 아빠랑 나는 전문가가 아니잖아...실무에 적합한 인물들은 아니다 이거지..
그리고 그레이스가 와인만큼은 최고였잖아...우리 서로 윈윈하자구....알았지?
그래...우리 잘해보자....
한식 오픈날이 정해지자 초조해진 혜인의 퇴근 시간 또한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혜인아....힘들지....얼굴 상한 것 좀 봐...이거 마셔...
죄송해요...어머니...일 핑계로 애들 어머니께 맡겨두고......
무슨 그런 말을 하니....지금 네 얼굴 상하긴 했지만.....표정만은 밝아....네가 행복하다는 게 보여...
수연이 특별히 혜인을 위해 정성스레 달인 약을 먹이고 있을때 뒤따라 주하도 피곤한 듯 터벅터벅 집으로 들어섰다.
너 약까지 먹어가면서 그렇게 할거야? 넌 방전도 안되는거야?
그리고 약사발을 들고 있는 혜인을 보자 그의 입에선 어김없이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수연은 버럭거리는 주하를 달래려 약사발을 건냈고 그는 미처 생각을 못한 듯 깜짝 놀랐다.
주하야...생각에도 없는 말 그만 하고 자...이건 네거야...너도 마셔....
네?
풉....아..죄송해요..어머니...약 뿜을 뻔 했네...선배...그런 표정 짓지 말고 어서 어머니가 정성스레
달인 약 드시죠? 방전되기 전에?
혜인이 자신의 약사발을 내려 놓더니 그의 코 앞에 약을 들이밀었다. 혜인의 향기와 함께 향긋한 한약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았다.
한 방울도 남기기 마! 그러면 내가 선배 혼내줄거야...앞으로 어머니가 주는 건 감사합니다..하고 다 먹어!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자 수연의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아픔의 빙산이 점점 녹아 먼 곳으로 떠내려 가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나....고생 했지?
어..어머니.....안 주무신거예요? 지금 12시 넘었는데...어떻게 해요....죄송해요...
머리를 긁적이며 유유히 현관을 들어서던 다희는 지금까지 주무시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의 반김에 정말 놀란 듯 말까지 버벅거리고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니 자식이 힘들게 환자들 보고 돌아오는데 애미가 맞아 주는 건 당연한거지...
하..하지만.....죄송한데....
왔어?
당황한 그녀와는 다르게 은호는 2층에서 책 한권을 들고 느긋하게 내려오면서 다희를 맞아주었다.
이 녀석아...!! 안사람이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기 전에 병원에 데리러 가야지..얼마나 힘들겠니?
아...아니예요...어머니....그게..오늘 산모가 언제 아이 낳을지 몰라서 제가 먼저 가라고 했어요...
혹시 이런게 고부간의 갈등인가 싶은 다희는 두 손을 크게 저으면서 어머니를 말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두 사람은 흐뭇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은호는 다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자 장난끼를 멈췄다.
어머니....그만하세요....저 사람 놀라잖아요...그런데 가끔 해주세요...저 사람이 저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 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
음....그럴까? 그런데 우리 서선생한테 미안해서말이지....
두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다희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뭐....뭐야? 장샘...나 놀린거야? 이...정말...!!
방에 돌아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다희는 망연자실한 듯 침대에 주저 앉아버리자 장난이 심했다는 듯 은호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나도 우리 어머니가 이럴 줄은 몰랐어...속인거 절대 아니야..진정해....얼른 뜨거운 물에 몸 풀어..
내가 물 받아 놨어....나 용서해 줄거지?
놀랬잖아....당신이랑 어머니 또 사이 안 좋아질까 봐...
은호는 아직도 놀란 얼굴의 다희를 바라보며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나 오늘 제이어스에서 회의하고 좀 늦을거야...루이스도 3지점 때문에 회의 갈거고...
그러니깐 너..적당히 하고....!!
선배! 알았어...알았다구....내가 아이야?
하진이 대기시켜 놀꺼니깐...!! 그 녀석 근무시간 초과하면 수당 무지 많이 부르니깐....
알았다구요!! 제발...회의 늦겠네....얼른 가세요....
문 앞에 서서 손잡이만 붙잡고선 잔소리를 늘어 놓는 주하를 혜인이 등을 떠 밀었다. 문을 열자 밖에선 하진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을 막고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주하는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뿌렸고 하진 역시 그의 표정에 얼른 손을 내렸다.
부사장님 잘 모셔다 드리고 저 바로 돌아옵니다...지부장님...!! 준비하고 계세요..!!
네...최비서관님...부사장님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고 조심히 오세요....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보내며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주하의 날카로운 눈은 그들의 눈짓마저 차단시켜버렸다.
최비서관! 똑바로 해! 지부장한테 휘둘렸다간...
어휴....왜 비서관님한테 그러세요? 그만 눈 푸시고 가세요...저도 얼른 끝내려면 들어갑니다..
혜인은 주하의 등을 살짝 밀어버리고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주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문이 닫히자 주먹만 꽉 쥐었다.
정말 내가 불안해서.....
부사장님...아직도 한지부장님 모르세요? 대학때도 항상 지부장님께 졌다면서....요?
야! 운전이나 똑바로 해!!
헉..또 버럭하시고...무서워서 운전이나 똑바로 하겠습니까? 그만 진정하시고...거기 서류 있습니다.
회의 시작하기 전에 점검 한 번 하시고 청심환도 옆에 준비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 지금!! 루이스가 몇 년 동안 해 왔던 걸 몇 달만에 끝내버리려고 저러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식에 매달려 있는 혜인을 생각하는 주하는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들이 눈에 들어 올 리도 없었다. 그리고 하진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한 듯 백미러로 그를 살짝 살짝 쳐다보면서 말을 했다.
사실 제가 보기에도 한지부장님....불안불안합니다. 정말 부사장님이 걱정할 만 한거 알아요...
무서울 정도로 일을 하시는데...부사장님, 루이스 부사장님보다도 무서우신 분이시죠...진정...!!
그런데 부사장님! 제발 오늘은 중요한 회의니깐 집중 좀 하세요....지부장님은 제가 책임지고
댁까지 잘 모셔다드릴테니깐요...이러다 회의 망치면 우리 메리어트 어떻합니까!!
멍하니 있던 주하는 하진의 큰 소리에 또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들고 있던 서류를 차근차근 검토하기 시작했다.
똑똑??
정신없이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던 혜인에겐 누군가 들어오면서 입으로 노크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하네...친구야!!!
어? 무영아!! 오랜만이다...무슨 일이야?
소윤이가 가보라고 해서 왔지..이 친구....일벌레라고 호텔에 소문이 쫙 났던데...얼굴이 완전 벌레네??
혜인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 보던 무영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야...그래도 벌레는 좀 그렇다...앉아...
적당히 해라...너 학교때는 피끓는 청춘이었지만 이제 우린 늙었다. 너 요즘 들리는 말이 뭔지 알아?
처음엔 역시 한지부장님 대단하시다...지금은? 완전 한식에 올인했다...웃지마...이거 좋게 말한거지..
나쁘게 들으면 너 지금 미친거야...!! 네가 한식 대표이사냐? 적당히 해! 너 그러다 쓰러지면 오픈이
낼모렌데...어쩌려구 그래? 너 완벽주의자 맞아...한가지 시작하면 미치는 거 알아...하지만 혜인아..
잘 생각해..네 주위엔 널 도와 줄 사람도 많고 네가 완벽한 지부장이 될 순 없어..얌마..사람이 말이지..
빈틈도 좀 있어야지...지금 한식 직원들 떨고 있더라야...너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앉아 있던 무영은 혜인에게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꺼내면서 열이 나는지 자리에서 이내 일어서고야 말았다. 함께 듣고 있던 혜인 역시 무영의말에 놀란 듯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버렸다.
정말?
그래...괜히 100대 1 경쟁자 물리치고 들어왔다고 난리야 난리....!!
혜인의 얼굴엔 이미 근심이 가득했지만 무영의 얼굴엔 장난끼가 가득했다. 더 이상 혜인을 괴롭혔다간 큰일이 날 것 같은 무영이 웃음으로 무시무시했던 사건을 마무리 지어 버렸다.
야...농담이야...지금 오픈만 기다리고 모두들 열심히더라...그래도 너 적당히 하라구...알았지?
반가운 친구가 와서 이야기 하는 동안 긴장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혜인의 머릿속엔 아직도 걱정거리 고민거리들이 가득했다. 아직 봐야 할 서류들이 책상 위에 한 가득 쌓여 있었고 한식도 한 번 더 돌아 봐야 할 것 같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 잠시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손에서 서류들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의 등 뒤엔 짙은 어둠이 내려 앉은 도시를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감싸 안고선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부장님...생각보다 회의가 복잡해져서 제가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문자 남깁니다....
부사장님이 어디시냐고 걱정 많으십니다...-
-조금만 하고 집에 들어간다고 전해주세요..최비서관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깊은 밤 지혁도 퇴근을 하지 못하고 주차장에 생긴 문제점을 점검하고 있던 차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혜인의 방을 보게 되었다.
한식 지부장실에 아직 불이 켜진 것 같은데...한지부장 아직 퇴근 안한건가?
네...그러신 것 같습니다..
저쪽 사각지대 CCTV 보이나 확인하고 저쪽은 한 대 더 달아야 할 것 같은데..지금 확인해 보도록..
지혁은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문제를 마무리 짓고선 황급히 혜인에게 달려갔다.
혜인아...! 정신차려....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