깼니?
눈을 떴지만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듯 세상이 뿌옇게 보이는 가운데 몇 번 더 눈을 깜박거리자 점차 수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마...주하에게 들었다. 혜인아....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왕이야...
지금은 조금 힘이 들어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 뿐이야...사람은 그 누구나 완벽할 수
없잖아...너무 완벽한 얼음여왕을 원하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어...네가 그렇게 노력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넌 충분히 완벽해...그러니깐 이제는 너와 가족들을 돌아보며
좀 쉬자꾸나...애들 보고 싶지? 조금만 기다리구 지금은 좀 더 자려무나...
혜인은 수연의 말을 다 듣고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정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 누구도 원망 할 생각도 없었다.
루이스...
지금은 오픈 준비만 생각하자..얼마나 기다렸는데....완벽하게 한식 준비 해야지...
그래..두 사람....지독한 것마저도 닮았어...내가 졌다. 혜인이 좀 전에 깼데...다시 잠들었지만..
혜성은 주하의 말을 듣고 있긴 하는건지 그저 자료만 열심히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한 그의 모습에 주하는 한 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곡기도 끊으시드만 역시 자식 때문에 살지요잉...우리 작은 사모님 얼굴에
인자 웃음이 보이네요잉....얼매나 걱정했는디...워매...싱싱허네요..크기도 크네요
우리 사장님 같으신 분 진짜로 없당께요...제주도 출장 가셔서 며느님 줄라고 요런
전복을 사서 보내시고...전 우리 사장님 같으신 분 첨 보네요...사모님...
여사님도 이제 그런 분 만나셔야죠...?
신이 난 김여사는 열심히 전복을 손질 하다가 수연의 말에 이내 손을 내려놓고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는 이제 늦었지요...어려서는 아부지 병수발에...시집가선 남편 병수발까지...인자는요 남자는
싫네요...그냥 여기서 사장님 내외분...부사장님 내외분...글고 눈에 넣어도 안 아풀 이뿐 찬성이
초롱이 봄서 살고 잡네요....제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읍었지요...
며칠 크게 앓던 혜인은 삶의 의욕조차 잃어버린 듯 하루종일 멍하게 창밖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턴가 수연이 찬성이와 초롱이를 그녀 곁으로 보냈다. 그렇게 의욕없이 흐릿했던 눈동자는 천사 같은 아이들로 인해 점차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리 와...찬성아...아니...초롱아 그거 먹는거 아니야...아니야....잠깐만.....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아래 세사람은 뒹굴기도 하고 눕기도 하면서 행복한 웃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몰래 바라보고 내려오는 혜성의 두 눈에도 행복감으로 가득찼다.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올라갔다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 온 그를 수연이 다정스럽게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이젠 오빠 원망하지도 않을테니...현사장님께도 그렇게 전해드리려무나...
주하가 그러더구나...너희 남매...가끔 심장이 궁금하다고....
얼음심장을 가졌다고 하죠? 저희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 같아요...그건....어쩔 수 없죠..
저나 혜인이나 한동욱의 자식들이니깐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혜성의 얼굴엔 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정말 고마워요...혜인이 힘들 때 항상곁에 계셔주셔서요........
그럼 전 가볼께요...완벽주의자인 한지부장의 마음에 들게 해 놓으려면
저도 밤낮없이 일 해야 하거든요...
오래간만에 보는 혜성의 미소에 수연도 안도감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제 그만 찬성이 어린이집에 보내지 그래? 안 힘들어?
무슨 소리...!! 이렇게 천사같은 내 아들 찬성이를 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한데....선배...우리 초롱이
기어가기 연습벌레야....어찌나 귀여운지.....
연습벌레라...안돼! 그건 결사 반대..!!얼마나 기어가기 연습을 했길래 새근새근 주무시나? 우리 공주?
주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초롱이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짓고선 찬성이를 쳐다보았다.
찬성아! 넌 뭐든 하다가 힘들면 관둬버려...알았지?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왕따 당하는거야...응?
어...난 싫어..힘든거...안 할꺼야...아빠..나 비행기 해줘....
어? 그래....
주하는 찬성이가 한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금새 잊어버리고 번쩍 안아 올렸다.
아빠 닮았어....강찬성! 쉽게 포기하다니...아니 힘든 건 안할라고 하는거...똑!같!아!!!
매일 같이 아이들과 뒹굴던 혜인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자 매일같이 걱정스런 한숨만 내짓던 주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식 오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어머 사모님.....왠일이실까요?
너 그거 나 놀리는 거야? 아님 진심 사모님을 원하는 거야?
글쎄....둘 다? 부사장님이 점심 사주신다고 오라고 한거야?
어...그런가 봐....너 또 크게 한 건 했던데..? 이젠 국제 홍보부는 이소윤 없으면 안 되는구나?
그런가? 내가 사모님한테 배운게 많잖아...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 붙이는거....어때?
나 이만 가련다...자꾸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데....
소윤의 농담에 혜인이 가벼운 미소로 장난을 치며 자리를 떴다. 드디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들이 사라진 듯 가뿐해진 뒷모습을 보고 있는 친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부사장님??
문을 빼꼼히 열고선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혜인이 들어섰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뿐 낯익은 뒷모습에 혜인은 멈짓했다.
왔어? 왜 그래? 얼른 와서 앉아...
아니...난....조금 이따 다시 올께....선배....
걱정 가득한 주하의 시선을 피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몸은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한혜인 한식 지부장님! 상의 할 일이 있으니 와서 앉으시죠?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무...무슨 소리들인지......전....
잡고 있던 문의 손잡이에서 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오빠에게로 향했다.
한지부장님! 다음 주가 바로 오픈인데 빨리 이걸 결제 해 주셔야지 늦지 않습니다!
오빠의 목소리였다. 분명...아빠와 많이 닮은 뒷모습....얼굴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 눈빛을 눈치챈 주하가 보다 못해 혜인을 데리러 갔다. 그리고 혜성의 바로 코 앞에 동생을 앉혔다.
아니 무슨 남매가 똑같냐? 이제 그만들 하시고 한혜인 고개 들어...오빠 눈 빠지겠다!
주하의 한마디에 얼떨결에 고개를 들자 이미 혜성은 사랑스런 동생에게서 두 눈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두 눈이 마주친 남매는 누가 먼저라고 하기 전에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미안하다....더는 나도 못 볼 것 같았어...난 한식 내 동생한테 주려고 한거지 일밖에
모르는 그런 바보에게 줄 생각은 없었어...혜인아...오빠가 미안해...
아니...오빠 말대로 난 바보였어...모두에게 실망을 주긴 정말 싫었어...
아...이 남매...정말....나보다도 꼴통들이었어...실망이야...둘 다...
미안해......선배한테도...그리고 오빠...나 그 자리 이제 싫어졌어...내가 그동안
얼마나 바보였는지 충분히 알았으니깐...그 자린 나에겐 과분한 자리야..그리고
내 욕심 때문에 내 가족을 잊고 살았어...그게.....선배한테 제일 미안한거구....
뜻밖의 혜인의 말에 주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두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던 혜성이 그녀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네가 지부장 자격이 있는지는 너 혼자 판단하는게 아니야..나 또한 마찬가지고
우리 한식은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지금 한국에 와 있는 한식 관련 직원들의
의견이야...그리고 그 의견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판단하고 결정하지...
혜인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조심히 열어 보았다.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눈빛이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아...그거 혹시 다 일본어로 된 거 맞지? 그거였어? 난 도대체 그게 뭔가 싶었는데...
안되겠다. 나 내일부터 일본어 좀 배워야지...이거 정말 왕따 된 기분인데?
투덜거리는 주하였지만 그 서류 속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목소리는 한층 밝았고 혜인을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이게...다 사실이야?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데...날......
난 일적으로 거짓말 따윈 안하는 사람이야..그 많은 내용들을 내가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다 사실이야....넌 절대 부족한 사람이 아니야...혹시..... 단 한 사람이라도
네가 부적합하단 말을 했더라면 널 그 자리에 억지로 앉힐 수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껏 네가 보여줬던 모습들...행동 하나 하나...그 사람들에겐 모두
기억되고 있었던 거야...진정 한식의 미래를 위해서 한혜인이라는 사람을 유심히
봤을거야...그리고 네가 보여준 진정한 모습에 널 믿고 따르겠다고 생각한거고..
곁에 앉아 유심히 듣고 있던 주하는 심각하게 그 서류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무섭군....도대체 한식 사람들은 정말 사람이야? 외계인 아니야? 설마 나까지 평가
한건 아니겠지? 이리 줘봐...한국 사람들도 몇명 있던데...좀 읽어보자....
없어...선배....선배는 한식이 들어 올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인데...메리어트까지 평가 할
이유는 없잖아?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얼굴에 드디어 작게나마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하와 혜성은 서로 바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주고 받았다.
음....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갑시다...한식으로...
무슨 일 있어? 왜? 한식....
서류를 뒤적이던 주하가 일어서기도 전에 혜성이 곁에 있던 혜인의 손을 잡고선 먼저 앞장서 나가버렸다.
아..뭐야...또....정말 아군은 아니야...분명히....
투덜거리며 뒤따라 간 주하가 마지막으로 한식의 VIP룸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한식의 간부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귀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한혜인지부장님...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주하와 간단히 점심을 먹을거란 생각만 하고 왔던 혜인은 갑작스런 상황에 그저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현정연 사장님과 한식을 함께 한지 20년이 넘었습니다만 지금 전 그때 그 기분으로
여기 와 있습니다. 제가 지원하기도 했지만 사장님께서 제가 가길 원하셨죠...그게 말이죠..
정말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20년 전 처음 한식을 시작하는 그 기분이죠..
그 때 현사장님 많이 힘드셨죠...일본의 중심 도쿄에 한식이라는 한국음식점을 감히..내겠다는...
메이지 호텔 이미지를 바꾸는데도 참 힘이 들었는데...몇 번이나 쓰러지시고도 꿋꿋하게 한식을
위해 노력하신 결과 지금 어떻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한식의 브랜드를 알리고 있습니다..그리고
드디어 한식의 뿌리..한국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김민성 지점장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자 벅찬 감정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건 제가 더 죄송합니다. 현사장님의 한국 진출을 말렸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혜성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있던 혜인이 그를 말렸다.
루이스 부사장님...이제 그만 하세요...조금 늦었지만 지금 우리가 모두 이 자리에 있잖아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한국에서 한식이 오픈 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신 분이잖아요...?
두 분....루이스 부사장님..한혜인 지부장님..두 분이 노력해 준 결과입니다. 이젠 그 노력의
결실만 남아 있는 겁니다. 한혜인 지부장님....함께 한식을 이끌어 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한식의 본점 지점장이자 이사인 김민성 지점장이 혜인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엔 혜인이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아니 전 많이 부족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사장님과 많이 닮으셨습니다. 지부장님.....행동 하나 하나 생각하는 것조차 닮으셨어요...
루이스 부사장님도 많이 닮으셨다 생각했었는데...역시 어머니와 딸이십니다..
아직 가슴속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응어리져 있던 혜인은 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지만 겉으론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너 오빠 말 들었지? 오픈 때까지 아니 오픈 후에도 무리하면 다시....
알았어....선배...혹시 선배 악덕 시어머니라고 알아? 정말 얄미워!!
방으로 들어오면서까지 잔소리를 하며 투덜거리는 주하를 향해 혜인이 한마디 쏘아 붙였다.
왜? 여기 있잖아...신데렐라 괴롭히는 계모...!! 너 유리구두 한 짝 어디다 뒀어? 어?
주하는 팔짱을 낀 채 잔뜩 골이 난 혜인을 그대로 침대로 쓰러뜨리더니 온몸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남매 사이에 흘렀던 냉기도 이젠 사라졌고 혜인의 지부장 자리도 굳혀졌고 이제 남은 건 오픈 뿐이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두 사람은 침대에서 행복한 웃음으로 하루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