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안절부절 못하시고....전화라도 한 번 해보세요...
그게요...사실 전화번호 몰라요.....
네?? 도련님...마음만 급하셨군요....
그러게요...안되겠어요...내가 직접 집에 가볼께요..어제 그렇게 보내는게 아니었는데..
류호는 일요일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제시의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심호흡부터 했다. 또 그녀에게 퇴자를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인지 긴장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나 초인종을 눌러도 역시 대답은 없었다. 그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지만 한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문득 스쳐가는 불길한 생각...
-저...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사장님...아니십니까...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제시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지금 집 앞인데....-
-아...그게 말이죠...집에 갔어요....-
-집이라면 여기 말고 어디 다른 집이 있나요??-
-아...거긴 혼자 사는 집이구 시골에 부모님 계시는데 거기 갔어요...
전화도 안 받죠? 그 녀석 집에 갈때면 핸드폰도 안 가지고 가거든요..-
-죄송한데 전화번호를 몰라요...-
-네에??? 두 사람....-
-바쁘시지 않다면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바쁜 일은 없지만요...저와 하실 말씀이라도...-
-마음만 급해서 제시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뭐...그렇담..제가 아는 한도에서 다 가르쳐 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났다.
사장님 맞으시죠??
네....앉으시죠...
역시 그때 얼핏 봤을때도 굉장히 동안이시고 잘 생기셨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뭐..저랑 동갑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아하하하하
그의 부탁으로 나오긴 했지만 무진장 긴장이 된 문아는 혼자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제 나이는 아시는 것 같구...실례지만 장문아씨는 나이가...
아..그렇군요...죄송해요...사장님 워낙 유명하신 분이시라서 신상정보가 좀....그러니깐
제 나이..아니 제시 나이가 29살이죠...꽉 찬 나이죠....
아.....네......
아니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사장님 어디 가셔도 일부러 나이 말씀 안 하시면
제시랑 별 차이 안 나 보이시거든요...뭐..제시도 좀 동안이긴 하지만요...
두 사람은 언제부터 친구셨나요...?
음...사장님 궁금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시군요...아무래도 그 자식이 입을 잘 열지 않아서요..
일단 나이는 말씀드렸고...대학 동아리 친구예요....만화 동아리...그래서 우리 직업이 바로
만화가랍니다....뭐 정확하게 따지자면 저와 제 여친은 그림 전문....제시하고......아...혹시
제시가 무슨 말 안했습니까...? 헤어진 남친이라던가..
남편이 먼저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런 머저리....
문아는 놀라서 혼자 중얼거렸다,
네??
아...아닙니다....뭐 그런 말은 또 다하고...아하하하하....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도 않고...
뭐 아신다니...제시하고 그 녀석은 스토리 전문이었죠....지금도 함께 작업을 하고 있구요..
그 남편분도 같은 친구였군요....
아...너무 신경쓰지 마세요....제시가 좀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리...
어이없이 자신의 흑역사를 다 불어버린 제시를 감싸주려 문아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말들을 꺼내 그녀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자기 때문에 남편이 떠났다고.....죄책감을 끌어 안고 살고 있던데요...
사장님도 그걸 느끼셨습니까....그 자식은 행복한 녀석이죠......제시 만나서 그토록
행복하게 살다 간 녀석도 없을겁니다....그건 제시가 자기만의 감옥을 만들어 자신을
가둬버리기 위한 변명일 뿐이었어요....마지막 가는 길에 사랑하는 여자를 품에 안고
갔다는 건....아 죄송합니다.. 사장님께 별 말을..
아니..그 분 정말 행복하셨겠네요...전 그렇게 하지도 못했는데....
네??
그럼 남편분이 떠나신지는 얼마나...
그 녀석이 26살 되던 해였죠...3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렇게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죠..
3년이라....전 2년 조금 넘었는데...그러면 제가 더 나쁜 인간이군요...
네??? 사장님...무슨...
전 아내와 딸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함께 있어주지도 못하고
떠난 후에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사장님이 정상이시죠...제시가...그 녀석이 이상한거예요......성격까지 바껴버릴 정도로
그 녀석은 집착이 너무 강했어요...자신이 마치 엄마인것 처럼요.....
그녀와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갈 길이 참 머네요...
그렇죠...전엔 그 녀석처럼 밝은 친구도 없었는데....지금은 암흑이예요...그래서 그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이번 작품은 코믹으로 가볼까 해서 제시가 자신의 아버지한테 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소설가시죠....
전 제시가 보석감정사인 줄 알았습니다...만.....
아하...아마 보석에 대해서도 많이 알거예요...자기 새엄마가 제시 다음으로 사랑한 게
보석들이었으니깐요....어린 제시를 앉혀놓고선 보석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죠..
제시 어머니가 새 어머니시군요....그래서 남편에 대한 집착이 더 컸군요....
뭐...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아무리 새어머니가 잘해준다고 해도
그 빈 자리는 메워지지 않았겠죠....아니..그런데...서로 전화번호도 모르고..이건 좀....
그러게요....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나봐요....
씁쓸한 류호의 미소에서 문아는 낯익은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류호의 기분도 좀 편안해졌다. 그리고는 그녀가 다시 돌아 올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엄마......!!
가자.....!!
어디.....?
목욕탕.....!
아니 난 더 잘래...피곤해...
야...니가 어둠의 자식이냐? 이거 봐...이거 때 아니야???
이불을 확 걷어 버린 수희는 누워 있는 제시의 목을 손으로 박박 밀기 시작했다.
아...아파...엄마...알았어..갈께....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엄만....
니 나이가 몇이건간에..나한텐 10살짜리 꼬맹이로 밖에 안보이거든...!! 빨리 나와!
그렇게 엄마에게 이끌려 오래간만에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제시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역시 겨울에는 뜨끈한 물에 몸 담그고 때 빡빡 밀어주는게 최고지...
아니.....설수희씨...!! 화려하고 진귀한 귀족같은 보석을 다루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이..완전 아저씨야...아저씨....그러고도 손님들이 찾아와??
꼬맹아!!! 내가 아저씨같아도 보석하난 기가 막히게 잘 보는거 몰라??
널 그렇게 가르친 게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거봐라...넌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 너 그 어제 토파즈 천연이란거 알아 본게 누구??
바로 너야...! 그만 그 만화 집어 치우고 내려와라....엄마가 다 전수해줄께...
싫어...그건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엄마보다 뛰어날 생각 없어...!!
거 봐라...니가 방금 말했다! 나보다 더 뛰어날 것 같아서 겁나니? 응? 이 엄마
자리 빼앗을까봐?? 너 사실은 그랬구나...녀석! 기특하지..엄마 생각도 다하고..
우리 이쁜 딸래미! 이루와 때 밀어 줄께....
아니...싫어...아파...
수희는 제시의 여기 저기를 타올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의 몸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랑의 흔적들이 그녀의 눈에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서 연해진 것...또 어떤 것들은 최근의 것인냥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아...이 꼬맹이....언제 때 밀고 안 민거야??? 와...하수구 막히겠다..도망 가야지...!!
엄마...!!
두 사람은 요란스런 목욕을 마치고 발그스레한 얼굴로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두사람 대낮부터 술 마신거야???
아빠.....엄마가 나 등 빡빡 밀어서 지금도 쓰라려.....
제시가 철부지 10살로 돌아간 듯 아빠에게 가서 안겼다.
이야...등짝에 땟자국 달고 다니던 녀석이...어디 아빠한테 엄마 흉을 봐??? 너 일루와..
아직 때가 덜 벗겨젔나보다....일루 와...!!
아...아빠...살려줘.....
여..여보...그만 해.....나도 힘들다...이 녀석 언제 이렇게 큰거야...?
아버지는 수희를 피해 도망 온 제시를 힘껏 안아 보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제서야 수희도 씩씩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가자....시원한거 마시러....
수희는 제시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수정과를 꺼내서 나눠 마셨다.
제시야....
응???
너....엄마 믿지?
당연하지...엄마 안 믿는 딸이 어디 있어??
그럼....대답해줄래?
뭘??
너 여기 온 이유....
그제서야 장난끼 가득 했던 제시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너 엄마 믿는다면서.....아빠한테 못 할 말도 엄마한테는 다 했잖아...?
그게....
제시는 수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들고 있던 수정과 잔만 만지작거렸다.
너 남자 있는거지....?
아니...
또 거짓말!!!
모르겠어.....
운이 떄문에?? 그 자식 때문에 새로운 사람 거부하는거야?
엄마..운이는....
그 자식은...그저....네 첫사랑이라고 생각해버려.....원래 첫사랑은 아픈거야.....
평생 못 잊을 정도로......
엄마.......하지만......
뭔데....? 또...혹시 너 그 남자한테 너 유뷰녀였다...남편이 나 때문에 죽었다......
이런거니? 이거 봐라...니 눈빛 보기만 해도 알겠다. 너 정말.....왜 그러니...?
그건 사실이니깐...
뭐가 사실이야??? 너 그 자식 호적에 올라갔어? 그 자식이 너 때문에 갑자기 죽었어?
정신차려...이 바보야!!!! 너 솔직히 지금 그 사람한테 흔들리지??
어??
네가 그 사람하고 잠자리까지 갔다는 건....
엄마...어떻게...
이미 모든 것을 수희에게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제시는 입술이 푸르르 떨렸다.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딸을 보자 수희는 더욱 더 제시를 다그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난 니 엄마야....네가 그럴 애야? 말해봐...함제시!! 네가 그 남자와
밤을 지샐 정도면...이제 그 자식은 잊으라구...엄마 눈 똑바로 봐...!
수희는 제시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두 눈을 마주쳤다. 이미 제시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천류운.....놔 주자....이제 너도 할만큼 했어....그 녀석은 네 첫사랑이구..
이제 그 두번째 사랑을 하러 넌 가는거야...알았지...?
엄마....미안해....난 그 두번째 사랑 할 수 없어...
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럼 다른 사람이라면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럴지도....
그래...네가 그렇다면....그래......대신 엄마랑 약속해...다른 사람하고는 두번째
사랑 하겠다고....빨리...
응.....
그래...내 딸....이 일은 네 아빠한테도 비밀이야..엄마하고 너만 아는거야....
수희는 제시를 있는 힘껏 안아 주었다.
흠.....벌써 2주가 지났군.....
류호는 달력을 보더니 제시가 떠난 날을 새어 보고 있었다. 그 때 최실장이 들어왔다.
사장님.....켄 매니저님이 오셨어요......
음....그래요....내려갈테니 기다리라고 해주세요...
네....
최실장이 나가려다 다시 뒤돌아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류호를 바라보았다.
사장님...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니오...제 얼굴이 어두워 보이나요??
조금요....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으셔서 걱정입니다...
아니 괜찮아요.....난 문제 없으니 최실장님도 걱정 마세요....제가 괜히 최실장님께
걱정을 안겨 드렸군요.....이거 미안한데요....
류호는 멋적은 듯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최실장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 모습을 들키기 전에 그녀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최실장님....그 토파즈 제가 직접 가져다 드릴테니 준비 시켜주세요...
아니 사장님....그런 일은 제가 다녀 와도 되는데요....
켄 매니저와 이야기 해봤는데 그 샵의 점주가 대단한 실력자라고 들었어요....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네..? 네...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럼 준비 시키겠습니다.
류호는 그 토파즈를 기다리는 곳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꽤 아담하군.....
류호는 토파즈가 담긴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선 샵으로 들어섰다. 샵에 들어선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작은 샵이라고 얕보고 있었는데 안에 진열된 보석들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기에 그는 두 눈이 반짝거렸다.
어서 오세요......뭐...찾으시는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네...아닙니다...전 쥬얼리 HAN에서 왔습니다..
토파즈...맞죠??? 우와....정말 빠르시네요....역시 쥬얼리 HAN입니다...어디 좀
보여주세요...
혹시 이 샵 점주되십니까??
수희는 그에 질문에 대답도 건성으로 하고선 그 상자를 얼른 열어 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리를 질러버렸다.
심봤다.....
그 소리에 놀란 류호가 그녀의 표정을 지켜 보더니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도대체 사장님은 어떤 분이시길래..이렇게 훌륭한 보석을
찾으셨단 말입니까....?꼭 한번 뵙고 싶네요..사장님을...
그러시다면 언제 한번 저희 쥬얼리 HAN에 들러 주시겠습니까...?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류호는 다시 한번 보석들을 둘러 본 후 수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너편에 주차를 해 놓은 탓에 조심스레 길을 건너갔다. 그리고 차에 올라서 다시 한번 그 샵을 쳐다 보았다.
어?? 제시...?
분명 제시였다. 잠깐 스쳤지만 샵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제시라 확신한 그는 재빨리 차에서 나와 길을 건너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차가 많이 지나다녀서 한참 후에야 길을 건널 수가 있었다.
저기...
어머...뭐 놓고 가신거라도....?
수희는 여전히 그 토파즈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류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혹시 방금 전에 들어 온 손님...어디 갔나요???
손님이요?? 아무도 안 왔었는데....혹시 귀신?? 호호호
천진난만하게 웃는 수희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제서야 자신이 잘 못 본 것이라 확신하고선 다시 인사를 하고선 밖으로 나가서 길을 건넜다. 그런 류호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 보던 수희곁에 제시가 집 안에서 우유를 마시면서 다가왔다.
뭐야?? 뭘 보는거야??
볼수록 매력 있단 말이야...?보석 중에 진귀한 보석같단 말이야.......청옥 중에 청옥...
뭐야...! 누가 사파이어란 말이야...?
성실하고 덕망있고....영원한 사랑의 약속....저 남자다...! 딱!! 제시야...
수희는 그가 떠날 때까지 눈길을 못 띄며 사파이어의 의미를 읊고 있다가 제시를 쳐다 보았다.
제시야......!!! 왜 그래....?
엄마...저 사람 여기 왜 온거야??
왜?? 토파즈 가져다 주고 갔는데...아는 사람이야???
이미 제시의 온몸은 경직되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뭐야?? 함제시...너 왜 그래??
제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