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는 아침이 되서야 눈을 떳고 방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는 문아와 보경을 보자 깜짝 놀랐다.
너희들...안간거야?
공주..일어났어??
역시 제시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을 보인 문아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 보경이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아..침대서 자야하는데..이거 완전 허리 아품....
너희들....
고맙지? 얼마나 보고 싶었음...이렇게 함께 잠이라도 잤을까?
맞아..우리 보고 싶었지..?
응....
또..다른 사람 보고 싶은 사람 없었어?
누구?
가자..가...장문아...우린 이제 가서 작업해야지....
시작한거야?
당연하지...걱정마...그런 눈빛 안 보내도 된다...우리끼리 지금 잘하고 있어..
두 사람은 제시의 상태를 훑어 보더니 물 한잔만 마시고선 바로 가버렸다. 제시는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좋지 않음을 느꼈지만 한 일주일 원석들과 씨름을 하더니 그새 녀석들과 정이 들어버렸고 이젠 날마다 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아 힘든 몸을 이끌고 또 다시 공장을 찾았다.
자네...어디 아픈가? 하긴 하루종일...구부정하게 앉아서 작은 애들하고
씨름을 하니...오늘은 이만 가보게나...
아니요..전 괜찮아요...오늘 이 녀석 새로 탄생하는 것까지 봐야죠...
환한 미소로 공장장님의 근심을 날려버렸지만 오늘 하루는 유난히 힘들고 어려웠다. 겨우 일을 마치고 어떻게 차를 몰고 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온 몸이 다 아프구나....엄마도 이렇게 시작했겠지? 그래..엄마...걱정마...
엄마 가게는 내가 지킬테니...에취....아..뭐야..감긴가...겨울 다 갔는데...
제시는 차 문을 잠그려다 말고선 재채기를 크게 한 번 하더니 추웠는지 잔뜩 몸을 움크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차장 한쪽에선 그 모습을 계속 쳐다 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제시가 집 안에 들어갈 때까지 차 안에서 바라보고만 있다 한참 후에 내려서 코트를 걸쳤다.
뭐야....이 우유...상한거야? 날짜는 아직 있는데..내 입맛이 간거야??
춥다면서도 냉장고에 들어 있던 우유를 꺼내 마시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선 우유의 텁텁함을 없애려고 다시 물을 꺼내서 마셨다.
아....손가락....이거 완전 관절염이네...아주 구부러지겠네....
제시는 하루 종일 원석을 잡고 있던 손이 저려왔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창고를 돌돌 감기 시작했고 거의 다 감았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던 제시는 집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그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게 아무나 문을 열어 주면 어떻합니까...?
말투부터가 굉장히 날카롭던 그의 눈은 제시의 손가락 마디에 붙여 있는 하얀 반창고로 향했다. 그의 시선에 당황한 제시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추며 또 다시 그를 밀어내는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기...전 이제 메이드 안..
하지만 그의 따뜻한 입술에 자신의 차가운 입술을 빼앗겨버린 후였다.
이제 더 이상 메이드 찾지 않을겁니다. 난 함제시 당신만 찾을뿐이죠...
전 당신....더 이상....
방금 전의 따뜻한 숨결로 인해 그의 눈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는지 제시는 또 다시 한 걸음 물러나 뒤돌아 서 버렸다. 다가가려하면 뒷걸음질치는 그녀가 못마땅했던지 류호는 제시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읍....
순간 제시는 몹시 아픈 듯 새어나오는 말과 함께 온 몸을 움츠렸다. 류호 역시 놀란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죠? 여행 다녀 온 후로 뭔가....
저기....전 정말...
여전히 들려오는 변명거리들...류호는 제시 앞으로 다가 가서 반창고가 붙여진 손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글을 쓰는 작가의 손은 아니네요......
제시는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류호의 손을 보더니 피식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 손보다 당신 손이 더 예쁜 것 같은데요...여자 손보다 더 예쁜 당신 손 때문에
어디 제 손을 내놓겠어요?
그 미소가 꽤나 맘에 안 들었던지 류호는 제시의 손목을 꽉 잡자 또 다시 제시의 입에선 아픔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픔까지 참으면서 가려는 길이 뭐죠?
그건 제 길이니 당신은 당신 길을 가세요....
제 이름은 천류호입니다....!!!
제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더 화가 난 말투로 류호에게 대항했다.
당신 이름 따윈 관심 없어요...이제 전 피곤하니 제 집에서 나가주세요...제발...
문을 열기 위해 현관으로 향하는 제시를 껴안은 류호는 그 팔을 세게 감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향기가 제시의 코끝에 걸터 앉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는지 제시는 류호에게 안겨서 눈을 감아버렸다.
제시...?
류호는 얼른 제시를 침대 위에 눕히고선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오르기 시작한 듯 따끈했다. 그는 재빨리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따뜻한 물로 적신 후 제시의 이마에 올려 주며 안타까움에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제시...지금 당신 몸 상태 최악이야....제발 나한테 기대....
류호는 입고 있던 코트와 수트를 벗고 넥타이마저 풀어버렸고 와이셔츠는 수시로 수건을 적시기 편하게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깜빡 잠이 들었던 류호는 제시의 신음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여전히 뜨겁자 급해지기 시작했다.
제시....제시.....이런......
그는 제시의 가방 안에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인지 새벽의 응급실은 의외로 조용했다.
언제부터 이런거죠?
저녁 때 쯤엔 조금 따뜻한 정도였는데....
보호자분....이쪽으로 오세요.....
네?? 아...네....
아픈 제시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류호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채 의사 곁으로 다가갔다.
남편분되십니까...?
네??
부인이 이 정도로 아플 때까지 뭐하셨습니까...? 아...아무튼 지금 몸살감기가 제대로
왔습니다. 일단 수액 다 맞으시고 지금 온 몸이 다 아플겁니다. 여기 근육이 경직 된거
보이십니까? 주사도 한 대 놓겠습니다. 수액 다 맞으면 집에 고이 모셔가셔서 극진히
간호 해주셔야 합니다. 안그러면 정말 큰 일 납니다..그럼 이만....
굉장히 진지한 얼굴과 말투로 겁을 잔뜩 주더니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의사....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는 웃으며 류호를 안심시켰다.
저희 선생님이 좀 과하시죠? 애처가라서요...그래도 저희 선생님 말씀 잘 들으셔야
해요.....지독한 몸살감기 같네요...일단 엉덩이 주사 놓겠습니다. 아내분 옷 좀...
네????
아픈 제시는 누워 있지...의사는 호통을 치지..그 곁에선 웃고 있지....류호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부인이 지금 의식이 없으니 남편분이 주사 놓게 옷 좀 걷어 주시라구요....정신이
없으시죠...? 얼마나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간호사는 얼떨결에 제시의 옷을 걷고 있는 류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엉덩이 멍 안들게 잘 문질러 주시구요...수액 다 맞으면 말씀하세요...그럼 이만..
그녀는 그렇게 가버렸다. 자신의 손엔 작은 알콜솜이 들려 있었다. 제시의 주사자국에서 피 한방울이 맺혀 있었다. 류호는 놀라서 얼른 솜으로 그 피를 닦고선 지혈이 되도록 꼭 누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 솜을 휴지통에 버리고선 제시의 옷을 정리해주고 똑바로 눕혔다. 수액이 들어가자 제시의 체온도 점점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류호는 수액이 다 들어가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디 봅시다. 음...열도 어느 정도 내려갔고...수액도 다 맞았고...그럼 집에 가세요..
네?
이제 가셔도 된다구요.....하지만 집에서도 안정을 취해야 우리 다신 얼굴 안봅니다...
네...? 아...네...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정신이 없었던 류호의 얼굴이 점점 편해졌다. 여전히 잠이 들어 있는 제시를 안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는 제시를 조심히 차에 태운 후 운전대를 잡은 류호는 한참을 생각 한 후 차를 몰았다.
도련님....
안 주무셨어요??
도련님이 안 들어 오시는데...제가...아니..이 아가씨는....
많이 아파요...좀 전에 응급실에서 수액 맞고 오는 길이예요.....아무래도 혼자 있는 집보단...
네....어서 침대에 눕히세요.....깨어나는대로 말씀하세요...죽 끓일테니..
고마워요....아저씨...
류호는 제시를 자신의 침대에 조심히 눕혔다. 그리고 자신도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시간은 새벽 4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음....
제시는 뒤척이면서 여전히 아픈 듯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류호도 깨어났다. 밖은 이미 훤해지고 있었지만 제시를 위해서 햇살을 모두 차단시켜버렸다. 또 다시 어두워진 방에서 잠시 보이지 않던 제시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녀도 무의식 중에 그를 안았다. 류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제시를 한 번 확인하고선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