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제시는 류운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 사랑 함제시....이 반지를 받아주겠소?
갑작스런 류운의 행동에 제시는 깜짝 놀라 바라 보았고 그의 멋쩍어하는 손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나 팔 아픈데....
어??
제시는 얼떨결에 류운에게 손을 내밀더니 이내 손가락을 짝 폈다. 조그마한 보석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안해...좀 더 정교하게 다듬었어야 하는데..내가 실력이 좀 딸리네...
그는 제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미안한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골든 시트린이네....이쁘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제시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은 듯 반지를 햇빛에 반사시키면서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환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류운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예쁘니? 다행이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신랑이 날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데...
역시 넌 보석에 대해서 잘 알아..그냥 우리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라...
뭐지? 천류운?? 네가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떠 넘기는거야?
우리 형은 정말 보석 세공도 완벽하게 잘하는데...난...미안하다...내 실력이 이래서...
또 말 돌리지 말고...!! 내가 신랑 형님이 세공을 잘하던 못하던 무슨 상관인데? 음?
난 당신만 있으면 되는데...안 그래?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제시는 류운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한 한낮을 보내고 있었다.
괜찮니?
그 때 낯익은 목소리에 눈을 뜬 제시는 여전히 입가가 올라가 있었다.
음...편하게 잤나 보구나....오래간만에 본다..네 미소...
엄마....
그래..네 미소도 봤겠다...가자..
어디?
네 자격증 찾으러....아직 있으려나 몰라...?
무슨..?
너 합격해놓고선 찾지 않은 보석 감정사 자격증 말이야!!!
아....
뭐? 아.....?? 얼른 일어나....
수희는 제시의 이불을 여지없이 확 걷어 버렸다. 추운 듯 제시는 잔뜩 몸을 움크려 봤지만 엄마에겐 안 통한다는 걸 알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뭐야? 사진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내가 이쁘게 하고 찍으랬지? 내 말 안듣더니...쌤통!!
엄마..미워...제일 안 예쁘게 나온 사진을 넣고선....
이젠 중간 점검 하러 가볼까? 이 정도면 나같음 합격인데 말이다...
무슨 중간 점검?
널 빨리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누가??
누구긴 누구냐? 네 오너 될 사람이지...!!
엄마...잠깐만....
걱정 마라...오늘은 아니다...이 꼴로 어떻게 사장님을 만나냐??
수희는 제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 보더니 인상을 잔뜩 쓰며 투덜거렸다.
뭐...뭔데..? 급하게 날 끌고 나오신 분이 누군데...지금....
가자...
어디?
아..옷 사러 가야지...이 꼴로 면접 보련??? 에휴...
두 사람은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아니 일방적으로 제시가 끌려 다녔다.
엄마..나 힘들어...나 아직 컨디션...
음...가자...먼저 아빠한테 보여주자...머리도 이뿌고...옷도 이뿌고..신발도 이뿌고...
알았어...나 빼고 다 이쁜거지?
어이구...우리 딸.....다 컷네....
수희는 제시의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언제나 그랬 듯 그 미소에 제시도 함께 웃어버렸다.
이게 누구야? 우리 딸 맞아? 완전 공주님이시네..
아빠...동화책 쓰는거야? 그 정돈 아니지....
역시 옷빨이야....걱정마라..네 아빠 너 잠옷으로 갈아 입으면 마법에서 깨어난다...
고마워..엄마...그리도 현실을 까먹지 않게 확 꼬집어 알려줘서...
걱정마..제시야...아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이쁜 공주야...
아하하하하하..정말...감사합니당...아부지...!!
제시는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아빠의 장단에 잠시 맞춰주는 듯 싶더니만 모든 게 귀찮았던지 그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후부터 그녀에겐 혹독한 시련이 찾아 왔다. 수희의 샵은 마치 공부방인 듯 여기저기 보석과 관련된 자료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너 내 노트북 좀 가져와봐...
왜?
시험 보게...너 아무리 자격증 땄어도 그게 언제적이더냐?
아니..어린 애도 아니고....나 그정돈 다 알아....!!
너!! 내일 사장님 만나는데 엄마 얼굴에 똥칠 할래?
아이구....엄만 보석 만지는 사람이 말투가...완전 공사판이야..!!
수희의 성화에 못 이긴 제시는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그녀의 샵에 누군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어머...
안녕 하셨어요?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사장님??
이쪽을 지나가는 길에....점장님 수제자가 궁금해져서요...
오호....기대가 크시군요...?
아무래도..점장님의 실력을 이어 받은 수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내일이면 만날텐데..사장님도 어지간하게 급하신가 봐요??
좀 전에 제시를 다그치던 무시무시한 빨간모자의 교관을 어디 가버리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돌변한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만 보이던 그는 이내 말을 돌렸다.
지금 어느 정도 실력인가요?
네...지금 시험 좀 보게 준비 해 오랬는데....아직 안 나오네요...
수희가 목을 길게 빼며 집 쪽을 바라보자 류호 역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참이 흘러도 기다리던 수제자는 나오지 않자 류호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초조해했다.
제가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어쩔 수 없군요...그럼 내일 정식으로 뵙기로 하고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요...요 녀석이 시험 본다고 하니 아마도 도망간 듯 싶네요...죄송해요..내일은
꼭 데리고 나갈테니 걱정 마시구요....
그런데 저희 회사로 오시지 않고 구지 밖에서 만나자는 이유가...
한물 간 퇴물이 그 큰 회사까지 찾아가면 다른 사람들 눈이 있잖아요...
아...네....그럼 이만...
류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선 밖으로 나섰다. 그가 차를 몰고 가는 모습을 우아하게 보고 있던 수희는 급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들어 가자 제시는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을 껴안고 멍하니 서 있었다.
너 뭐하는 거야? 시험이 그렇게 무서워??
어? 아니...그게...손님이 있는 것 같아서...
손님? 아....그래서 안 나온거야?
무슨 손님이셨어?
쥬얼리 HAN...사장님!!
어??
믿고 싶지 않은 듯 제시는 깜짝 놀라 움찔했고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고 수희는 예리하게 바라 보고 있었다.
엄마....그 사장님이라는 사람 왜 온거야?
왜? 그게 왜 궁금할까?
아니 무슨 보석 주문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와서....
당연히 거래처인데..와 보는게 당연하지..저번에 그 토파즈 반응도 확인할 겸...
토....토파즈?
제시는 순간 류호가 자신을 위해 커팅하고 있던 투명한 담황색 토파즈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운이가 줬던 골든시트린 마저 생각이 나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생은 골든 시트린...형은....담황색 토파즈라....
뭐? 시트린? 토파즈? 누가? 뭐야...그거 11월 탄생석이잖아...누가 너 생일 선물로 준데??
어..? 아니....그러네....시트린도..토파즈도.....
그래...넌 그 두 보석 착각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절대로???
제시를 바라 보는 수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엄마...꼭 면접 보는데 이렇게 과한 화장 해야 해? 아직 추운데 치마가 너무 짧잖아....!!
넌..정말..사회생활을 하나도 안해 본 티를 꼭 내야하니? 이건 기본이라구...너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해? 그런 꽤재재한 얼굴로 어딜 가려고??
네..네...알겠습니다...하던거 마저 하십시요!!
또 다시 시작되는 엄마의 폭풍 잔소리에 모든 걸 체념한 듯 제시는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뭐야? 회사로 가는게 아니야?
회사로 가서...내가 널 데리고 들어가서....사장님께 퇴짜 맞고 그냥 나오면...
날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건데...그 창피함을 나보고 어떻게 감당하라고??
엄마...뭐야...딸래미한테 격려는 못해 줄 망정...그게 말이야?
그러니깐 똑바로 하란 말이다...얼른 앉아!! 다소곳이 무릎에 손 얹고..
네..네...네..
얼굴은 스마일...툴툴 거리지 말고....그래...자연스럽게 하라구...
두 사람이 티걱태격하고 있을 무렵 커피숍의 문이 열렸다. 난생 처음 보는 면접에 꽤 긴장이 되는지 제시는 무릎에 올리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오셨어요? 사장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시가 엄마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선 순간 얼굴엔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죠?? 당신??
함제시!! 사장님한테..무슨...
당신이었군요...점장님의 히든카드가..
놀란 듯 멍하니 서있는 제시와는 다르게 류호의 얼굴엔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지 수희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
엄마....이건....
이런 기회가 또 어디에 있다고 네가 지금 투덜거리는 거야?
이 자리가 상당히 불편해 일어서려던 제시의 팔을 수희가 잡아 끌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랑이엔 관심조차 없는 듯 류호는 여전히 제시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쥬얼리 HAN에서 일 할 생각 전혀 없습니다...
지금 전 굉장히 급합니다..수석 감정사 자리가 공석이라...
그렇죠..? 이 아이가 바로 제 딸래미입니다...어려서부터 보석들과 뒹굴어서
왠만한 감정사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사장님....
네....작은 사진 한장을 스치 듯 보고선 천연이 아니라는 것 쉽게 알아차리는
분이죠...저희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전 당신 회사에...
아...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두 사람 좀 아는 사이 같은데요...구면이라면
일 하는데 덜 서먹할 것 같군요...그렇지 제시??
엄마....난 적어도 사장님이라면 울 아빠 정도 나이는 되야지...이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은 전혀 융합되지 못하고 있는 듯 서로 동문 서답만 내밷고 있었다.
제가 좀 젊죠...저희 집 어른들이 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괜히 꺼냈나 싶을 정도로 슬픈 표정의 그를 보자 제시의 가슴 한켠도 아려 왔다. 늘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주셨던 운이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자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앞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해져야만 했다.
그런 것 관심 없습니다.....엄마..전 정말 이 사람 회사에서 일 못해요...
함제시...너 이런 아이였니? 이 엄마가 널 이따위로 키운거야??
엄마!!
죄송합니다..사장님...제가 이 아이 친엄마가 아니다 보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렇게 훌륭한 감정사로 만들어 놓으신 분이신데요..
두 분..이제 그만 하세요...먼저 갈께..엄마...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기 힘이 든 제시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버렸고 그와 동시에 류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제시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점장님...이 감정사 제가 오늘부로 채용하겠습니다. 그럼 제 직원 데리고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네? 아....네....
이성을 잃은 제시와는 달리 침착함을 잃지 않은 류호는 수희에게 인사를 하고선 그대로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거 놓으시죠?
어제도...나 때문에 샵으로 들어 오지 않았던 건가요?
이거 놔요!!
내가....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 인내심이 바닥이 난 듯 그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고 자신의 차로 데리고 가서 차를 타자마자 문마저 잠가버렸다.
뭐죠? 납치라도 하시겠단 말인가요?
전 당신 어머니께 제 직원 데리고 가겠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만....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운전을 했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더 이상 제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옆을 바라보니 제시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은 화가 덜 풀린 듯 주먹을 꽉 주고 있었고 안쓰러운 듯 그가 손을 펴주려고 만진 손은 꽤 차가웠다. 그제서야 자신이 히터도 틀지 않고선 차를 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류호는 자신의 수트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나 때문에...나에게 끌려 나오느라 자신의 코트조차 못 챙겨 와버렸군...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곳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저택이었다. 그는 곤히 잠든 제시을 자신의 수트에 감싸안고 그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급하게 연락을 받아서 아직 난방이 따뜻하지 않습니다만..
괜찮아요..이장님...그럼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는 침실로 제시를 데리고 가서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여전히 꽉 쥐고 있는 두 주먹을 보니 그의 마음도 편하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