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셨습니까...?
아니..사장님....여기까지 어떻게....
갑작스런 사장의 출두에 두 부장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제시는 천천히 그것도 마지 못해서 겨우 일어났다. 이미 류호는 그런 제시의 모습을 슬쩍 보고선 살며시 미소 지으며 두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장님들 격려차원에서 들렸습니다...
갑자기 격려는...무슨 일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입 수석이 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구요...
드디어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간 류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제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
그들의 말을 듣고 있긴 했는지 멍하니 서 있다 들켜버렸다.
어디서 이런 똘똘한 아가씨를 데리고 오셨습니까..? 수석 자리에 앉혀 놔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한 인재입니다.
그렇죠? 제가 사람은 좀 잘보죠..? 그런 의미에서 함제시씨 저 좀 잠깐 보죠?
네? 그..그게..
아니..자네..사장님 앞이라고 너무 떨지 말게..평소의 자네 모습을 보이라구..
장부장이 멀뚱멀뚱 서있는 제시의 등을 살짝 밀었다. 류호가 먼저 앞장을 서자 그 뒤를 역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따라가는 제시였다. 두 사람은 조용한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단 며칠만에 어떻게 두 부장님에게 잘 보인거죠?
글쎄요....전 누구하고 달라서요...
다정스런 눈길을 피해 시선을 확 돌려버리며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는 제시..류호의 얼굴엔 조금씩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직도 화 안 풀린건가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거죠?
그건 됐구요...저 오늘 좀 빨리 퇴근하고 싶은데요...
무슨 일 있어요?
네..
데려다 줄까요?
아니오....그러지 않아도 만나게 될 것 같은데요...
네? 무슨 말이예요?
아닙니다. 사장님...그럼 전 이만...
단단히 화가 난 듯 또 다시 하는둥 마는둥 인사를 마친 제시는 아직 낫지 않은 발목을 살짝 절뚝거리면서 걸어갔다. 이번에도 역시나 알 수 없는 말만 늘어 놓고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류호는 팔짱을 깬 채 그저 멀어져가는 제시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저예요...
제시의 손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또 한번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오지 말라고 했잖니...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꺼니?
어머니..운이가 좋아하던 버섯전하려고 사왔어요....
너!! 정말 모른척 이렇게 올거니? 이제 너도 니 인생 살라고 했잖아....
어머니 좀 늦었죠...? 제가 빨리 할께요...
제시는 그녀의 말은 듣는 척도 안하고 본인의 말만 읊조리다 이내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주방에선 이미 운이의 상에 놓을 음식들이 몇가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제시는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제시야.....
어머니가 먼저 준비하시고 계셨네요..? 죄송해요....
운이가 이런 네 모습 좋아하겠니?
제시는 자연이 하는 말이 절대로 들리지 않은 척 꿈쩍도 하지 않고 음식들을 정성스레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음식들이 상에 놓이기 시작했다.
운아...이젠 제시 그만 오라고 해라....
그녀는 상에 놓인 음식들을 쳐다 보면서 한숨 섞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시...네 사람 아니다...언제까지 곁에 두려고 하는거니...?
어머니....운이 음식 먹게 그만 하세요...
이 바보야...운이는 이제 이 세상 사람아니다구...제발...정신차려...!
네가 이러면 내가 죽어서 운이를 어떻게 보겠니? 이젠 너도 좋은 사람
만나라구...제발....너 좋다는 사람 만나라구......!!
순간 제시는 류호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깜짝 놀라 고개를 마구 저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만큼 뒤죽박죽 되어 있는 가방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건을 찾자 손이 조금 떨렸다.
어머니...이거...
뭐야? 이건...네 반지...아니니...? 이거 왜?
어머니 드리려구요....
네 반지를 왜...?
반지를 받아 든 그녀는 제시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받아 든 손을 꽉 쥐었다.
그래..잘 생각했다. 이젠 이런 거 다 버리고 넌...
아니..아니예요...절대로...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거...아니예요...
그제서야 제시는 설움에 복받힌듯 울기 시작했다.
너...무슨 일 있니..?
전 그 반지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어요.....운이를 잊어버리고...전......
네가 무슨 짓을 했건간에...이미 운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그리고 넌..
아직 젊어...이젠 알겠지? 넌 이 반지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 그러니 이젠
네 갈길 찾아 가거라....
어머니....전....죽을 때까지 이 집 귀신으로 남을겁니다. 제발 막지 마세요...
너..정말........나보고 어떻하라구...그래..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라.....
한없이 가여운 아이....그녀는 따뜻한 손길로 제시를 다독여 주었다. 한참 후 제시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괜찮니?
네...어머니....전 이만 가볼께요...더 이상 운이 볼 자신이 없어서요....
그래..조심히 가거라....
커다란 죄를 지은 제시는 축 늘어뜨린 어깨에 절뚝거리는 발로 운이의 집을 나섰다.
누구지?
류호가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면서 운이의 집에서 나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두운 밤 작은 가로등 불빛 뿐 자신의 차도 시동을 꺼서 누군지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그 모습에 눈길이 갔다.
-어디니?-
-집 앞이에요..들어갈께요..-
자연의 전화를 받는 사이에 조금씩 희미해져가던 뒷모습은 어둠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어머니....
그래...고맙다...와줘서....
늦어서 죄송해요....이런 날 혼자 계시게 두는게 아닌데...
괜찮다...운이랑 같이 있었는 걸?
애써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쓸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수석은 어떻게 됐니?
지금 평가 준비하고 있어요...
평가....? 그럼 스카웃 해 온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
네....요즘 저희 회사가 평판이 그리 좋지 않더라구요....
그래...네가 대표이사가 된 후로 내가 한 번도 회사에 나가지 않았구나...
조만간 내가 한번 갈테니...그 신입 수석 한번 보자..
네....그럴께요..
제시는 무거운 족쇄를 지고 힘겹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밤새 눈이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
안녕하세요...
뭐야? 자네..눈 밑에....그 눈은 또 뭐고?
아...밤새 고민 좀 했더니...
고민한 눈이 아닌데? 자네 울었나? 왜?
힘들어서지....이렇게 빡세게 돌리는 회사가 어딧어? 우리야 이골이 났지만..
아니예요....그게.....제가 정말로 이 회사에 필요한 존재일까..하는...
어허...자네 정말....큰일 날 인물이네....자네처럼 총명한 인재는 못 봤다니깐...
그래..그건 양부장 말이 맞아...그 어느 실력있는 감정사보다 자넨 대단해...
뭐랄까.....보석을 보석으로 볼 줄 아는 눈이랄까...?
하지만..지금 쥬얼리 HAN에서 필요한 사람은....수석이잖아요...경험이 풍부한...
경험이야 우리도 풍부해....
아무래도 자네...평가가 다가오니..걱정되서 그러나 본데..자네 정도라면 문제 없어...
암...그렇지....우리 한번 잘 해보세....우린 자네가 필요하다구...
그때 사내 전화가 울렸다. 장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호출이네...아무래도 이번엔 사장님이 사람 하난 잘 본 것 같다구.....
그럼 다녀올께요....
여전히 사장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 앞에는 최강 최실장이 버티고 있었다.
아직 사장님 출근 전입니다. 기다리세요...
그녀의 한마디에 제시는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그 순간 아주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제시의 바로 등 뒤에서 멈췄다. 그리고 익숙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아..죄송해요....제가 좀 늦었죠? 함제시씨..들어오시죠...
제시의 곁을 류호가 스치듯 지나가자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애써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구둣소리와 향 때문인지 자꾸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게 되는 제시였다. 그 감상도 잠시..정적을 깨는 듯한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제시의 뒤에서 멈췄다. 류호 역시 소리를 들었는지 방으로 들어가려다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Bruder!!!
상기된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의 여자가 제시의 바로 뒤에서 크게 외쳤다. 그 낯익은 목소리에 류호가 놀라서 뒤돌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류호를 힘껏 끌어 안았다. 제시를 스쳐 지나갔던 그녀의 몸에선 류호의 향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행동에 제시는 모든 것이..그를 향해 요동치던 심장마저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오빠.....
안나.....여긴 어쩐 일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익숙한 듯 보였지만 류호는 당혹감을 떨칠 수 가 없어 보였다. 그녀를 떼어 놓으려고 류호가 밀어냈지만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는 그녀를 떼어내는 것이 뜻대로 되진 않은 듯 보였다. 류호는 제시와 최실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그녀를 달랠 수 밖에...
무슨 일로 온거야? 안나...말 좀 해봐....
오빠 보고 싶어서 왔지..나 안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회사는 어떻하고 온거야?
아...아빠가 말 안했구나..나 여기서 오빠랑 같이 살려고 왔어...
안나..그게 무슨 뜻이지? 이런...아직 시간이.....
류호는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더니 당혹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맞아...독일은 아직 새벽이지....오빠..여기가 오빠 방이야?
드디어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온 안나는 류호의 방을 벌컥 열더니 휙하고 들어가 버렸다.
미안해요..함제시씨...내가 조금 후에 사무실로 갈께요....
네...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대답을 힘없이 하고 뒤돌아서 가는 제시를 보자 류호의 마음 속은 온통 미안.미안.미안..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