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해골 되도 난 모른다...네가 안 먹은거지...
그래도 가끔 밥 먹잖아..먹고 싶지 않은데 어떻하라구....나 원래 일 할 때도
밥 굶고 일 많이 했어...걱정마..고모...
그래...알았다.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어라...
벌써 제주도에 온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태연한 척 하던 제시는 고모가 나가자마자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전원을 눌렀다. 역시나 몇통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다급한 긴장을 하면서 그 문자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애들아....좀 정리 되면 갈께....
역시 문아와 보경이 걱정하는 문자였다. 친구들 생각에 잠시 멍하다 다시 빠른 손놀림으로 마지막 문자까지 확인을 했지만 류호는 없었다.
뭐야...뭘 기다리는거야..함제시!
류호는 제시가 떠난 후 더 미친듯이 일에 매달렸다. 다른 사람이 가도 될 곳을 본인 스스로 출장까지 가면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사장님...스케줄 좀 가지고 와....최실장..
그녀가 가지고 온 스케줄표를 보더니 부사장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너무 무리하는거 아니야? 혼자 다니는 거야?
거의 혼자 다니시고 현지매니저 통해 일 처리를 하고 계십니다.
독일...? 안나 때문인가?
네...그 점도 있고...그쪽에서 우리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그 때 조건 달았을텐데...?
네...그래서 그 문제도 함께 해결하시러 가신다고 합니다.
독일까지 가려면 이제부턴 무리하면 안돼...이거..그리고 이것....다른 매니저 보내도록 해..
네...알겠습니다.
최실장도 부사장의 스케줄 조정이 꽤 맘에 드는 듯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갑자기 왜 그러는거지...? 혹시 제시하고 무슨.....설마...말도 안돼.....
류호의 걱정으로 온 얼굴이 찌뿌려진 그녀는 둘이 함께 집으로 온 날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왔다는 점...그 후 제시가 짐을 싸서 나갔고 류호는 지금까지 미친듯이 일만 하고 있는 사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운채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호야...요즘 힘들지...집에 와..작은 엄마랑 저녁 먹자....-
그날 저녁 그녀는 류호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왔구나...이런...얼굴 좀 봐....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신 앞에선 항상 환한 미소를 보이던 류호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한없이 안쓰러운 표정과 말투로 까칠해진 류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요즘 일이 좀 많아서 그래요...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랬구나...너 다음주에 독일 간다면서?
네? 아....네.....
안나....보낼 생각이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회사에서 일 할 만한 인재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제시는...?
그나마 영원한 안식처에 들어와 따스한 위로로 자그마한 미소가 얼굴에 번질 때 쯤 머릿속 서랍장에 꼭꼭 숨겨놨던 제시가 툭하고 튀어 나와 버렸다. 당황한 그의 두 눈은 흐릿해지고 머릿속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그냥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사람은......
너..제시가 운이 여자였다는거 모르고 있었니?
그녀는 혹시.설마..하는 마음으로 류호에게 되물었다.
네???
그래..우리 회사에서조차도 모르고 있으니....온지 얼마 안된 너는 더 모를테지..
꽤 능력 있어 보이던데....왜 회사에서 일을 안 한거였죠..?
아들조차도 들어오기 싫어한 회산데....그 아이가 오려했겠니...?
운이 곁에서 마지막까지....지켜줬던 여자가 그 여자...인가요...?
초점없는 눈. 얼굴엔 핏기가 사라진지 오래되버린 류호는 거의 체념한 듯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래....나보다 나은 애였지...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했거늘....마지막까지....
미련한 것.....죽을 날 받아 논 아이인 줄 알면서도....
자연의 입에선 제시를 원망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조카인 류호를 걱정하는 그 눈빛으로 하던 말을 마저 하지도 못했다.
혹시......우리 회사 때문이었나요...?
역시 힘겹게 말을 꺼내는 류호는 휘청거리려는 몸 때문에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덤덤하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글쎄.....우리 회사가 탐이 났더라면 자기가 앞장서서 결혼부터 하자고..
혼인신고부터 하자고 했을텐데....그래서 더 미련하다는거야....
그럼.....아무 것도 없는 건가요....?
미련한 여자...제시를 생각하는 류호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운이가 회사 지분 가지고 있던 거 양도 해준다고 변호사까지 불렀는데..
죽어도 안 받겠다는구나.....지금도 운이가 준 지분 가지고 찾아 온단다....
정말 바보같은 여자군요....그 재능이 아까워서 곁에 두려했는데....
어둠 속의 아픈 기억을 깊숙히 감춘 채 왜...자신 앞에서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건지....제시의 환한 미소 끝에 뒤돌아선 눈물이 생생하게 그의 두 눈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계속 반복되자 거의 폭팔하지 직전까지 도달한 그는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는 독일로 떠났다.
-제시야.....내 전화 받아줘서 고맙구나...안나도 곧 다시 독일로 돌아 갈거다..
얼굴 좀 보자꾸나.....-
-어머니...죄송해요....제가 좀 멀리 와 있어서요....-
-지금 류호도 안나 일로 독일 출장 갔단다...-
-네?? 아...네...그럼 제가 며칠 내로 짐도 가지러 가겠습니다.-
-그래...기다리마....-
혹시 들킨건지....자연의 뜻밖의 전화에 제시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 앞에서 무슨 변명따위를 할건지...그렇다고 어머니가 그 변명을 그저 들어줄지...반나절을 꼬박 고민하더니 제시는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는거야? 귤 좀 싸주랴? 네 손 좀 봐라...누렇다...
고모....이제 그만 채씨 아저씨 고문하고 좀 봐주라....불쌍하다...
너야말로 가자마자 어깨에 무거운 짐부터 던져버려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절대 타지 않던 비행기까지 타면서 그를 피해 도망을 쳤는지 그리고 또 다시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에 올랐던 제시는 왠지 자신의 집엔 가기가 싫었던지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 딸...고민 끝냈어?
무슨 고민...?
얼른 들어가자...배고파? 밥 줄까? 요거 말랐네..고모가 밥도 안주던?
어?
멍하니 서 있던 제시의 볼을 살짝 꼬집어 보던 수희는 갑자기 화를 버럭 내더니 애꿎은 그녀를 닥달하기 시작했다.
내...이 여자를....우리 딸이 귤만도 못 하다는 거야?
아니야.....고녀석들 얼마나 이뿌고 맛있는데....
뭐? 귤이라면 질색을 하던 함제시가...귤을 먹었다고? 별일일세...충격이 컸나?
수희는 제시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도통 이해가 안간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했다. 역시 집인가..집에 돌아 온 제시는 그나마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바로 회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어머니...부장님들께 말씀도 못 드리고 나와 버려서 못 뵙겠어요...점심시간에
맞춰서 갈께요....-
제시의 전화를 받고선 그녀는 안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또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오늘 점심시간 쯤해서 회사로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다신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이곳..제시는 조심스레 회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사장실 앞에 도착하자 또 다시 긴장을 했다.
어...왔구나.....
의외로 그녀는 너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못 본 사이에 심하게 수척해진 제시를 바라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
너...어디 아픈거니? 왜 이리 힘도 없어 보이고 말랐니?
아..아니예요...화장을 안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예요...헌데 무슨 일로 저를...
그럼 다행이지만....사장님이 네 재능 잘 보시던데...우리 회사에서 일 해보지 않겠니?
죄송해요...그건 사장님이 잘못 보신거구요..저 그렇게 뛰어난 재능 같은 거 없어요..
그럼 또 집에 틀어박혀서 글이나 쓰겠다는 거야?
안쓰러운 눈빛을 보인 그녀였지만 제시는 단호했다.
어머니 그 자린 저에게 과분해요...그리고 그 난리를 피우고 또 다시 이 회사에
돌아오고 싶지는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점심시간 다 끝나기 전에 전 제 짐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그럴테지...아무래도 류호가 불편할테지......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히 부사장실을 나온 제시는 감정실에 가까워질수록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자신에게 잘해주던 두 부장님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선 눈물을 닦았다.
뭐야? 함제시? 또 여긴 무슨 일이야?
부사장실로 향하던 안나가 제시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선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며 제시의 뒤를 쫓아갔다.
-너 어디니? 왜 안오니?-
-아..잠깐 짐 좀 가지고....아무튼 바로 갈께요....-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제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안나는 부사장의 전화를 대충 끊어버리고 그녀를 따라 감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게 누구신가? 또 뭐야? 무슨 미련이 남아서 또 온거야?
짐 가지러 왔어요....
그녀의 또각거리는 구둣소리와 진하게 풍기는 류호의 향기...제시는 쳐다보지도 않고선 자신의 자리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너 그거 사실이야? 그런데 왜 우리 오빠랑 자주 돌아다니는데?
이제 그럴 일 없으니 제발 걱정마시죠!!
이게...!!
씩씩거리며 잔뜩 언성을 높이는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녀가 꼴보기 싫은 안나는 제시의 박스를 발로 힘껏 걷어 차버렸다. 저 멀리 내동댕이 쳐지는 박스를 보자 제시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한 듯 언성이 올라갔다.
무슨 짓이죠?
너까짓게 감히 류호오빠를 넘봐?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다.
난 내 동생까지 버리면서 여기까지 온거라구...!!
뭐라구요? 동생을 버리다니요?
안나가 걷어찬 박스를 다시 정리하며 이 억지같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던 제시를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그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칸나씨를....버리다니....무슨 뜻이죠?
그 애만 아니었어도...오빠 곁엔 내가 있을텐데...그때...그 사고....내가 냈어...!!
평온한 얼굴로 그냥 툭하고 던지는 말투. 제시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하지만 안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이어갔다.
뭐...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바보 같은 게....지 딸 보호하려다 그런거야....!
당신...사람 맞나요? 어떻게 당신 동생을...조카까지....그 사람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그 사람도 알고 있나요? 당신이 저지른 일...?
그걸 왜 오빠까지 알아야 할까? 단순 교통사고였는데...?
살려고....살고 싶어서....살아야 할 사람들인데......당신이 뭔데....!!!!
칸나와 샤인의 해맑게 웃는 모습이 제시의 머릿 속을 흔들어버리자 이성을 잃은 두 손은 안나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이거 놔....감히 너 주제에 내 동생도 넘보지 못한 오빠를...네가 감히?
안나는 오만한 눈빛으로 있는 힘껏 제시를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힘없이 바닥으로 내팽게쳐진 제시는 한참을 흐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난 내 동생도 죽였어...너까짓껏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계속되는 안나의 폭언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제시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배를 붙잡았다.
더 이상 이 회사에서 네 얼굴 안 보고 싶으니 빨리 네 짐 싸들고 여기서 나가!
옷깃을 매만지면서 안나는 감정실의 문을 요란하게 닫더니 나가버렸다.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설마 또 제시랑 마주친 건 아니겠지?
부사장은 걱정스런 마음에 감정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가는 동안 불안한 마음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에 감정실 문을 열자 누군가 고통스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시야!!! 무슨 일이야? 왜 이래?
바닥에 웅크린 자세로 제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배를 꽉 잡고 있었다. 놀란 자연은 제시를 부둥켜 안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