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가 떠나고 난 후에도 수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제시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뿐...
엄마....
우리 딸 다 먹었네? 어때...? 이젠 뭐 좀 먹을 수 있겠지?? 그럼 됐어...또 뭐 먹고 싶은거
있음 말해...이 엄마가 다 만들어 줄테니깐....알았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말하던 수희는 제시를 안심시키고선 그릇들을 씻으러 황급히 나가버렸다.
호야...병원에 다녀오는 거니? 제시..어떠니..?
그게....작은 어머니...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하죠?
말해봐...무슨 일이야?
자연은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류호가 걱정스러운 듯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잠시 머뭇머뭇거리던 류호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쌍둥이래요....
뭐? 뭐라구? 그게...사실이야? 세상에...어떻게.....
그런데...두 사람....부정하고 있어요...그 사람은...두 눈으로 직접 다 봤으면서도....
얼마나 혼란스럽겠니....너하고 제시...이젠 헤어질 수 없겠구나...아니 그럴 수 없지...
하지만...작은 어머니...우린....
제시....우리 운이와 관계 된 거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하겠지...?
난 너와 제시가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구나...너희들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마...
류호 역시 이 상황이 쉽지는 않은 듯 끝내 자연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함제시?
밤새 뜬눈으로 지새던 제시가 겨우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그마저도 방해를 받아버렸다.
무슨 일로...
너 정말 대단하구나? 그렇게 욕심이 많았던 거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쥬얼리 HAN이야? 처음엔 작은 아버지 아들을 유혹하더니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나 보지? 이젠 작정하고 우리 오빠를 유혹해? 너 정말 미친거
아니야? 어떻게 너 같은 게 사장님, 부사장님 다음으로 지분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나 했더니..넌 나보다 더 못된 애야..알아? 임신이라구?
우리 오빠...칸나가 아이 낳다 죽을 뻔 한 이후로 아이 못 낳는다구..
그런데 이따위 쑈를 하려드는거야? 정말 앙큼한 애였어...너란 애!!
다짜고짜 병실로 쳐들어 와서는 하는 말이 한마디 한마디 제시의 심장을 후벼 파는 말 뿐..하지만 그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제시는 그저 안나의 독설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분에 못 이긴 듯 안나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지만...
맞아...난 아주 못된 여자야.....정신 차리자...함...제...시...
류호는 다급한 수희의 전화를 받고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제시의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사람...어디 갔습니까...점장님...네..?
이 망할 놈의 천씨 집안은 끝까지 우리 딸 괴롭히는군요...
미친 듯 뛰는 바람에 아직도 숨이 찬 류호는 침대 위에 빠져 있는 링거 주사의 핏자국을 보자 자신의 온 몸에 피가 다 빠져 나가는 듯 현기증에 잠시 휘청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따윌 걱정할 겨를이 없는 그는 미친 듯 또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제시가 갈 만한 곳을 뒤죽박죽 엉켜버린 머릿 속에서 차근차근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당신하고 갔던 곳이....이렇게...없다니.....
없었다. 없었지만 그는 단 1초라도 그녀와 함께였던 곳을 미친 듯이 찾아 다녔다. 하지만..역시나...없었다. 상실감과 좌절감이 온 몸을 검게 물들이고 있을 때 그는 또 다시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이런....지금...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운이의 나무에 기대어 지친 듯 쪼그려 앉아있는 제시를 본 순간 류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조차 어려워보였다.
설마...운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운이가 다시 돌아 온다고 하던가요?
말해봐요! 함제시! 당신 곁으로 이렇게 나처럼 찾아 온다고 했냐구요!!!
날카롭게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든 제시는 얼마나 울었던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제시의 얼굴을 보자 몸 속에 잔뜩 퍼져 있던 분노는 점차 사그라들어 류호는 꽉 쥐었던 주먹을 펴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힘이 다 빠져버린 몸을 잡아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의 손길조차 거부한 그녀는 또 다시 나무에 기댈 뿐이었다.
고작 나무 밑에 숨어있는 녀석 때문에...살아있는 생명들을 거부하고 있는 건가요?
지금 당신 앞에 요동치고 있는 내 심장소리 따윈 들리지도 않냐구요! 제발...
류호는 어떻해서든 나무에서 떼어 놓기 위해 무릎을 꿇고 제시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저항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제시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난 천류운의 여자라구요....
내 품에 안겨 있는 내 여자의 입에선 또 다시 억지스런 말이 튀어 나왔고 애써 진정시켰던 마음에 분노의 불씨가 되살아 나버렸다. 그리고 주먹으로 운이의 나무를 치기 시작했다.
운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 했을 것 같나요? 비겁한 겁쟁이 천류운!
비겁 하단 말 취소해요! 당신 동생이라구요!
내 동생은 이렇게 끝까지 비겁한 짓 따윈 하지 않아요!
그럼 어떻하라구요...안나가..이 세상이 사실을 전부 알아버렸는데....
그의 주먹엔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고 그 생채기에서 피가 한방울씩 떨어지자 제시는 죽을 힘을 다해 그를 나무 곁에서 밀어내며 품에 안겼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류호가 양팔로 감싸 안자 제시는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당신.. 단지 그게 겁났던 건가요?
그녀의 모든 것을 끌어 안았다고 생각했던 류호는 자책감에 할 말을 잃었다. 더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은 제시는 마지막 힘을 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나무를 붙잡고선 떨고 있었다.
미안해 운아 너도...사장님도 구해주지 못해서..이게 내 한계인가봐...타락천사의...
날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함제시 당신뿐인 걸 왜 모르는 건데요..
그리고 제시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류호의 입술이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당신과 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건 너무 무모한 짓 이예요
당신도 나만큼 무모한 거 알아요? 당신 아픔 알아요...미안해요..나와 운이 때문에........
운이가 못 지켜 준 운명...내가 끝까지 지킬께요..천사에겐 많은 제약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달라요..악마인 나는...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날개조차도 꺾을 수 있어요
내가 그러만한 가치가 있나요? 한낮 타락천사일뿐인 내가...
그 말뜻은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거죠?
어느새 류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제시의 눈빛도 점차 안정을 찾은 듯 했다.
아! 운아...소개 해 줄께 네 형수야.....
갑작스런 류호의 말에 놀란 제시는 그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그 모습에 또 다시 류호가 미소 지었다.
네 형수가 부끄럼을 많이 타는구나..운아..당분간 너 보러 못 올 거야.. 잘 지내고..
너와 나 함께 할 운명은 아닌 거 알아..그리고 언젠간 난 지옥 불에 떨어질테지..
하지만 이 여자! 내 목숨 걸고 지킬 테니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편히 쉬어..
나무에 걸러 있는 사진 속 류운의 미소는 모든 것을 포용 할 수 있는 천사의 미소 그 자체였다.
이제...다신 울지 말아요..당신 눈물 볼때면 내 심장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차 안에서 미동조차 없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려주던 류호는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여전히 예민해 있던 제시가 그의 손길에 눈을 떴다. 그는 얼른 슬픈 미소를 감추고선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여긴 어디예요?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 줄 병원이예요..그 누구도 찾지 못할...
아직도 어리둥절한 제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 사이 류호는 차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휠체어에 그녀를 태웠다. 이젠 정말 저항 할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건지 병실로 향하는 동안 제시는 그저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셨습니까..도련님...아가씨..
병실 안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된 제시는 조금씩 안정감을 되 찾은 듯 편안한 모습으로 그를 반겨주었다.
저 때문에...여기 계신거예요?
제가 대충 정리는 해 놨습니다. 아가씨 얼른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공손한 집사는 제시의 차가워진 손을 데워주기라도 하듯 살며시 잡아 주더니 병실을 나섰다.
옷도 엉망...손도 엉망..온 몸은 차갑고..
언제 들어갔는지 향기로운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에서 나오던 류호는 새하얀 셔츠의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의사 선생님이 잠시 욕조에 몸 담그는 정도는 괜찮다더군요..기다려요..내가 도와줄테니..
긴장이 풀린 그녀는 불편한 휠체어 의자에 몸을 맡긴채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다가오자 황급히 일어서버렸다.
제...제가 할테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합니까..?
사실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에도 휘청거렸고 지금은....그의 품에 기대어 가느다란 숨소리만 내뿜고 있을뿐이었다.
저...이제 정말 제가 할테니 그만...
왠일인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던 제시는 속옷만 남은 상황에선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요...그럼 저도 땀에 흠뻑 젖은 이 몸을 좀...
순순히 제시를 놔준 류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졌다. 뿌연 수증기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의 완벽한 몸을 또다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제시는 정신을 차리고선 향기로운 욕조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물 온도는 적당하나요? 너무 뜨겁지 않죠?
샤워부스 안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자석처럼 제시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나요....? 어....
걱정스럼이 잔뜩 묻어나던 그의 입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느다란 팔이 그를 감싸 안자 차가운 물줄기를 얼른 잠갔다.
미..미안해요...차가운 물이라...
아니...괜찮아요...당신이 항상 따뜻하니깐요...
그의 체온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팔은 더욱 세게 그의 몸에 감겼다. 등 뒤에서 속삭이는 한마디 한마디에 류호는 심장이 터지는 듯 벅찬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냥 이대로 언제까지 있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
이제 그만 침대로 갈까요..?
네??
절대 풀리지 않을 듯 단단히 감고 있던 그녀의 팔이 마법이 풀린 듯 스르륵 풀려버렸다. 역시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류호는 얼른 뒤돌아 고개 숙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꾸 이상한 상상을 하는데...이런 거....태교에 좋지 않은데....
놀리지 말아요...그건 사장님이 먼저..
이제 저 사장님 아니예요..이젠 그 호칭 좀 바꾸죠?
새하얀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뒤돌아 서는 그를 또 다시 빤히 쳐다보던 제시는 들켜 버렸다. 류호는 그녀의 시선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연신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왔다.
좀 전에 했던 말...무슨 뜻이예요?
그게 말이죠....미리 말 안해서 미안한데...이미 난 모든 걸 버리고 왔어요...
무슨 뜻 이예요? 그럼 회사는요...?
민자연 사장님이 모든 걸 정리 해 주실 거예요..그동안 우린 잊혀 질 지도 모르죠...
사장님.....
이제 전 사장 아니라구요. 그저 사랑스런 함제시의 남편일 뿐이죠...이제 그런 눈빛
더 이상 보이지 말아요...흠...당신 아니 우리 애들이 귤 좋아한다면서요? 가요
네?
제주에서 감귤농사나 짓고 살아요. 우리....
푸른 빛이 감도는 사파이어 같은 미소를 짓는 류호의 얼굴을 보고 있는 제시의 가슴 속에 따스한 불씨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