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밖이 다 보이네....
그의 집 답게 욕실 역시 투명 유리창으로 시내 야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긴장감이 풀린 제시는 무릎에 턱을 올리고 멍하니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깜짝 놀란 제시가 뒤돌아 보니 언제 들어 왔는지 류호가 욕조에 와인을 뿌리고 있었다. 그 와인은 따뜻한 물의 수증기를 타고 급속히 퍼지더니 달콤한 향이 제시의 코끝까지 닿았다.
이건..저번에 마셨던 그 와인 같은데요...?
역시 절대 후각이시군요....전 항상 이 와인만 마셔요....
비싼 것 같던데..이게 뭐하시는 거예요?? 아깝잖아요....부잣집 도련님????
당신 위해서 일부러 와인 뿌려 준건데.....이런 대접을 받네요...
그러다 갑자기 류호는 걸치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어버리더니 욕조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또 한 번 방심을 하던 제시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찰라 삐끗하더니 그에게 안겨버렸다.
벌써 취한거예요? 욕조 안는 미끄러우니 조심해야죠...
저 혼자 있으라는 거 아니었어요?
전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그리고 당신 간호하느라 나도 힘 다 빠졌어요....
류호의 품에 안겨 있던 제시는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듯 얼른 뒤돌아섰지만 그는 여전히 느긋한 자세로 그녀 주변에 남은 와인을 마저 뿌렸다. 그 달콤한 향은 또 한 번 그녀의 온몸을 감싸며 점점 빠져들어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허나 마냥 달콤한 향을 즐길수만 없었던 제시는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고 또 다시 그에게 화를 내버렸다.
또 절 가지고 싶으신가요?
잠시 후 뒤에선 조용히 와인병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두 팔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런 감정 정말 오래간만이네요....당신이란 여자...꼭 누군가 당신을 내게
보내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은데....당신은 여전히 거부하고 있군요...
그냥 절 안고 싶다고 해요...그럼 훨씬 편할테니깐요...
여전히 날카로운 말투....류호는 제시를 자신 앞으로 돌려 세웠다. 그 역시 화가 난 듯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가 필요했다면 이렇게 당신에게 매달리지도 않았을거에요..
정말 나 혼자서만 이러는겁니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 느낌도 없어요?
없어요...나에겐 오직 내 남편밖에...
그럼 지금 그 남편 어디있죠?
류호는 정말 화가 난 듯 제시를 욕조에 앉히더니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 답지 않은 거친 행동에 당황한 제시는 재빨리 손으로 그를 밀어 봤지만 이미 두 손은 그의 심장 앞에 꽁꽁 묶여버렸다.
내 심장 소리 들리죠...? 난 당신 앞에 있는데....
그녀 앞에서 점점 커져가는 심장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류호는 그녀의 대답따윈 듣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을 훔치고선 품에 안았다. 달콤한 와인 향에 취해 뿌얗게 흐려진 욕조안에서 제시는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이 마약처럼 자신에게 조금씩 스며들고 있음에 화가 났지만 이미 그에게 중독되어 버렸다.
이제 살아 있다는 걸 느끼나요?
거친 숨결 사이로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감싸자 제시의 손은 그의 팔을 꽉 잡아버렸다.
난 여기 있다구요...당신이 잡고 있는 이 팔....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물결은 여전히 작은 요동을 치며 와인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제시의 마음 역시 요동치는 한 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눈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당신도 날 원하잖아요..그렇죠.....?
제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류호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또 다시 흐르는 눈물....
사랑한다고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께요.....당신과 지낸 그 날 이후 난 정말
하루도 당신 생각 안한 적 없어요....내겐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함제시..
당신이 필요하다구요....
이런 게 쾌락인가요? 이런 느낌이.....죽을 때까지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류호는 그녀를 더욱 더 세게 껴안았다.
당신....
당신이 처음이예요...이런 감정....내가 우숩다고 하지 말아요...내 남편은
환자였으니깐요.....하지만 괜찮아요..날 처음으로 안아 준 사람이었으니..
뭐라 말해야 할지...
괜찮아요....이젠.....
제시는 예전처럼 당당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버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류호도 무거웠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일어나서 제시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괜찮아요...난 타락천사니깐....
제시의 새하얀 등에서 피어오르는 은회색의 날개....그 날개는 천정을 향해 바람을 일으키며 펼쳐졌다.
타락천사라......걱정 말이요..타락천사는 아무 죄가 없어요..그 죄를 따진다면 악마인 내가...
다 받을테니 당신은 내 검은 날개 속에 숨어요..언제까지나..
검은 빛을 내뿜는 날개가 류호의 등에서 나오더니 커다란 날개는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날개는 점점 제시의 은회색의 날개를 덮으면서 제시의 몸마저 감싸버렸다.
악마가 타락천사를 물들였단 건가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몸으로 추운 듯 침대에 누운 제시가 류호에게 던진 한마디였다.
새하얀 날개가 악마의 검은 날개에 물들어 점점 은회색으로 변한거죠....
류호 역시 아직 물기가 남은 몸을 가까이 대자 조금 전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제시가 움찔했다. 그녀의 반응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또 다시 제시의 몸의 물기를 찾아 입을 가져다 댔다.
악마가 선사한 쾌락의 끝을 보죠..우리...
제시의 몸에 남아 있는 물기에선 와인의 향이 퍼지고 있었다. 류호는 그녀의 머리결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그녀의 모든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에 흐르고 있는 와인향은 점점 더 진해져만 갔다.
타락천사 솜씨가 꽤 괜찮은데요??
악마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꽤 나쁘지 않네요...
솔직히 나도 이런 감정 처음이예요....휴....
류호가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제시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순간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악마에게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닌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죠...하지만 진정 원하는 사랑은 모든 걸 다 가진 악마에게도 없었으니깐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류호의 슬픈 미소를 본 제시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은 슬픈 미소....
이런...다시 샤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색해져버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제시는 곧장 욕실로 가버렸다.
어머...
샤워기를 틀자마자 류호가 제시를 뒤에서 또 한 번 껴안았다.
이젠 당신 향이 없는 곳은 상상을 할 수가 없군요...
혹시 당신도 타락천사 아닌가요? 악마면 좀 더 악마답게 행동해봐요...
제시가 자신을 껴안고 있는 류호의 손을 감싸면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내가 감을께요...이러지 마세요...
기다려봐요...눈 감구요..안그러면 눈 따가워요...
류호가 제시의 머리에 샴푸를 잔뜩 뿌리고선 머리를 감겨 주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아..따가워...
거봐요..어디 어디가 아파요?
악마와 타락천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소꿉장난에 두 사람은 한 동안 샤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머리 감겨주는 솜씨가 제법 출중한데요??
그렇겠죠...꽤 자주 감겨줬었으니깐요...
네?
그 당황한 표정.....귀엽네요...내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되나요?
아니....말도 안되는....
내 딸은 가능했죠....
그럼 딸 머리를 감겨줬었나봐요....?
제시는 류호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류호도 제시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아직 젖어 있는 제시의 머리에 입술을 댔다.
너무 미안했죠....무심한 나 때문에.....
운명이죠....당신과 내가 가지고 가야 할 아픔이죠....
맞아요..운명이죠...당신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서 그 공통점을 위로하면서...
아니...우린 그저 쾌락을 쫒는 자들이예요...더 이상은 안돼요...
더 이상 달콤한 악마의 유혹에 빠져 들지 않으려 제시는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