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계속되던 몸살은 어느정도 사그라들었지만 지금 제시의 머리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아니라구요...이건 최근에 발견된 보석 중 하나라구요...

            그럼 그렇다고 차근차근 말 할 것이지...왜 그리 소리는 지르나?

            정말...답답하네요....저 따로 방 주시면 안되나요??

            글쎄...자네 실력이 대단하긴 한데..아직 뭐...정식 수석도 아니고

            정식 수석이 된다고 하더라도 수석 자린 저길세...알겠나?

            저 머리 아프니깐 바람 좀 쐬고 올께요...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는지 안나는 진한 향기를 내뿜으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모두들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독일에선 향수로 목욕을 하고 오나? 이거야...머리 아파서...

            풉....

            자넨 이게 우습나? 자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라구..

            뭐..전 수석 자리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으니깐요...그냥 부장님들과 여기서

            일했으면 하는 것 뿐이예요..

            그러지 말게...제발..부탁이야...우리 좀 살려주게..저 여자가 수석이 된다면

            우린 회사를 나가겠네....

            그래....지금껏 어린 상사를 많이 만나봤지만...저런 경우는 없었네...이건...

            음...그러세요? 그럼 제가 힘 좀 써 볼까요? 오늘부터 저 야근할테니깐요들

            부장님들...얼른 얼른 머리 속에 지식들 다 토해놓고 퇴근들 하세요...!

            저런....너무 무섭네....우리 지식들 다 빼먹고 버리려구?

            아니...부장님들...아직도 절 모르세요? 의리빼면 시체...저 함제시라구요..

            그래..그래...그럼 저 여자 들어 오기 전에 지식 좀 토해볼까나...?

퇴근 시간이 다 되서야 겨우 사무실로 들어 온 안나는 지루하다는 듯이 시계만 쳐다 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먼저 갈테니...알아서들 퇴근하세요...!!

            잘가슈...

그 한마디 뿐 모두들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안나는 심통이 난 듯 의자를 발로 한번 크게 걷어 차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런...승질하고는....

            자...이만하면 됐나? 더 필요한게 있으면 내일 말하게나...언제든지 환영일세...

            네...감사해요..그럼 두 분 먼저 퇴근하세요..전 이 자료들 정리 좀 할께요...

            자네 아직 얼굴 창백하네...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들어가게나...그럼 내일 보세..

어느덧 두 사람도 퇴근을 하고 사무실엔 제시 혼자 남았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만한 시간이 없었다. 두 부장님이 준 자료를 정리하면서 제시는 평가 준비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졸리네....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지...뭐..평가 준비하고....또....

제시는 안나를 생각하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 주먹으로 뭘 하려고 그러시나요?

며칠동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피곤함이 한꺼번에 싹 사라질만큼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색 조차 할 수 없는 제시였다.

            좀 쳐다 보죠? 거의 일주일만에 보는데...당신 보고 싶어서 내일 오려던 걸 당겨서

            바로 왔는데....

            저 지금 좀 바빠요...

            평가 준비하는군요.....어때요? 자신 있어요?

그가 다가왔다. 그의 향기도 따라 다가왔다. 그 익숙함에 책상위에 놓인 서류들을 정리하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괜찮아요...내가 주울테니 그대로 앉아 있어요...

고개 숙인 류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서류를 주워 제시에게 주면서 바라보는 눈빛은 걱정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이...좀 쉬어가면서 해요...제발...

            사장님.....당분간 저에게 신경 안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당분간이...저에겐 끝난 것 같은데요...이만 하고 가죠...

류호는 서류더미를 덮어버렸다.

            무슨 짓이예요....?

            당신..지금...굉장히 예민해져있어요...걱정 될 만큼...일단 나가죠...저 배고픈데..

            전 배 안고파요....

            당신 보려구 저녁 식사 초대도 뿌리치고 왔는데...좀 봐주죠?

무심한 척 서류를 넘기던 제시의 손이 멈췄다. 그제서야 류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얼른 서류들을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중요한 서류들이 담아진 것 같아 보이자 류호는 제시의 손을 잡았다.

            아니..제가 갈께요...

            못 믿겠어요...전 제 눈을 안 믿어요..제 손을 믿을 뿐이죠...

언제나 따뜻한 그의 손을 잡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 제시였다. 마지 못해 그를 따라가는 것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제시의 마음은 류호의 것이었다. 사무실의 불을 모두 끄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손은 겹쳐 있었다. 류호의 한 손엔 서류봉투가 들려 있고 나머지 한 손은 제시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

            뭐 먹고 싶나요?

            저...사장님...여긴 회사예요..이만 손 좀...

            아..이 손이요? 지금은 다 퇴근하고 우리밖에 없을걸요? 혼자서 무섭지도 않았어요?

류호의 눈빛...걱정스러움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에 제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때 저만치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 오빠? 오빠 맞지?

            너...왜 아직 여기 있는거야? 독일로 돌아가지 않은거야?

갑작스런 안나의 등장에 당황한 류호에게서 조심스레 손을 뺀 제시는 서류 봉투까지 류호의 손에서 빼앗은 후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뭐야? 두 사람...?

            아...안나씨.....사장님이 배고프시다는데요?

그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제시의 입에서 원하지 않던 말이 툭하고 나와버렸다. 자신은 물론 그 말을 듣던 류호의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을 보자 더 그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제시였다.

            정말? 오빠...뭐 먹고 싶은거 있어? 나가자...

안나에게 이끌려 가는 류호의 눈빛은 여전히 제시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둘이 가는 반대 방향으로 제시는 몸을 틀었다. 어떻게 회사를 나왔는지 모를만큼 걷다 보니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시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면 땅이 꺼질까요?

            네?

            미안해요...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무슨 한숨이 그리 처량할까요?

            안나 보디가드씨군요....방금 안나 저쪽으로 갔는데요...?

            알아요...사장님하고 팔짱 끼고 꽤 다정해 보이던데...그래서 보디가드 때려치우려구요..

            그래요....?

            뭐예요....? 그 흥미 없다는 듯한 말투...!! 별루 안 좋은데요...이 어두운 밤길에 아가씨

            혼자 걸어가면 큰일나는데.....자..가죠..? 제가 집까지 데려다 줄께요..

            됐어요...아가씨라면 큰일 날지 모르겠지만...전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라서..걱정없어요..!!

            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합니까??

            제가 주성씨한테 왜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이 대화를 계속 이어 가야 하는 걸까요?

            어?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네요? 이거 영광인데요..?

            아니...그게..명함을 그렇게 제 코 앞에 들이 대 놓을 땐 언제구...

            그래도 명함 한 번 보고 기억해주시다니...제가 아주 마음에 안 든 건 아닌거죠?

            죄송한데요..제가 시간이 별루 없어서요....이만 가볼께요...그럼..

제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제시가 걸어가면 걸어갈 수록 더 커졌다. 그 웃음이 거슬리기 시작한 제시가 뒤를 돌아봤다.

            뭐죠? 그 비웃음은?

주성은 말 대신 손가락으로 제시가 걸어가던 방향을 가리켰다.

            허...!!

            그렇게 시간이 없으신분이 다시 회사로 들어가시려고 합니까..? 가죠...집이 어디 쯤 이예요?

창피한 제시가 고개를 숙이던 사이 주성이 그녀의 팔을 잡고선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니..이 손은 좀 놓죠?

            손 놓으면 또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 반대 방향으로 걸으시려구요? 그건 제가 하는 일이

            아닌데요...?

            직업이 뭐죠? 남의 일에 간섭하기? 유부녀 농락하기? 이게 맞는 것 같군요...

            자꾸 아줌마 아줌마 하는데...어딜 봐서 당신이 아줌마라는거죠? 아이 있어요?

            그럼 남편분 어디 있어요? 그리고...결혼 반지도 없으면서...거짓말 적당히 하죠?

제시는 자신의 빈 손가락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죠...거짓말쟁이 아가씨...!!

주성은 아무 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제시의 손을 잡고선 자신의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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