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태양을 삼키고 있는 바다가 붉은 빛을 내뿜고 그 앞에 제시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함양....

               네?

그 곁에 고모의 소꿉친구이자 이 귤밭의 일꾼 정훈이 조용히 앉았다.

               너...왜 온거냐?

               그럼 아저씬...왜 여기 온거야?

               임마...내가 먼저 물었잖아....

               뭐....그러나...? 나? 귤 먹으러....

               귤을? 네가? 흠...네 고모도 아무 말 안하고...아무래도...너 걱정스럽다....

               뭘...걱정씩이나.....아저씬...얼마나 됐어? 아줌마....

그제서야 정훈은 붉은 바다에서 눈을 떼더니 센치해진 눈으로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거 완전히....과부 둘에다...홀애비 하나라...저 하늘만큼 어둡구만....

               안 보고 싶어?

               나 싫다고 떠난 사람이 어디가 이뻐서 보고 싶냐?

               거짓말....내가 아저씨랑 아줌마 잘 아는데...?

               요 녀석 보게나...그럼 넌 네 신랑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누??

               응....그런것 같아....보고 싶어.....정말로......

바다가 제시의 얼굴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쯤....고모가 두 사람을 불렀다.

               채정훈...함제시...저녁 먹자....빨리 와...

               음...한 과부가 우릴 부르는구나...가볼까??

               아저씨....함세영씨 좋아하지...? 그냥 데리고 살아버려...

               욘석아!! 세영이가 좋다쿠나 얼씨구나 하겠구나....

정훈은 꼬맹이의 머리를 콩 쥐어박더니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장난끼 가득한 제시의 표정 뒤에 속앓이를 알아차린 정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네 신랑 말고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구나..?

               그렇게 보여?? 완전 도사야..도사...돌팔이 도사....!!

               뭐?? 돌팔이까진 아니다..

               우리 고모....불쌍한 사람이야...아저씨가 이젠 고모 좀..행복하게 해줘....

               그래서 잘나가던 회사 때려 치우고 여기 와서 시커멓게 탄거잖아...?

               그래...그런데 말이다...네 고모가 떠나간 남편을 못 잊고 있잖니...

               그래도 잡아야지...이제 우리 고모 곁엔 아저씨밖에 없잖아....?

               너....혹시...다른 사람 생겼니...?

제시는 정훈에게 들킨게 창피한 듯 고개를 얼른 돌려버렸다.

               그래..그렇구나....너도 혼란스러운거지? 네 고모처럼...어쩜...두 여자가..

               똑같니....제발 그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지금이 어느시댄데..열녀야??

               누구야? 네 고모는 이제 쭈굴쭈굴 할망구 다 되서 나 말곤 봐 줄 사람도

               없어..하지만 넌...이렇게 이쁜 과부가 어딧어? 왜..? 챙피해??

               아니야....그런거.....

               너...세상 모든 사람들 다 속여도 난 못 속이는거 알지? 내가 너 태어날때부터

               봐 온 사람이야... 왜 그리도 힘들어? 그 사람이 힘들게 하는거야?

               아니야.....이제 그만해...가자 세영씨 화 낸다...

제시는 얼른 먼저 일어나 정훈을 일으켜 세웠다.

               너 여기 온지 벌써 3일째야...밥 좀 먹어라....아니 그런데 이 부모는 딸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찾지도 않냐?

               냅둬...두 사람 사이에 낄 생각 없으니깐....

여전히 아침부터 제시는 귤을 까고 있었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쥬얼리 HAN이 모두 출근할 시간이 다가오자 슬슬 불안함이 밀려 오고 있었다.

               아직 출근 안하셨다구??

               네...부사장님...

부사장은 류호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선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직접 집으로 찾아 갔다.

               부사장님...오셨습니까...?

               네...집사님...고생이 많으시죠...?

그녀는 서둘러 류호의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 가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

               금요일 밤부터 아프시더니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래요...?

자연는 잔뜩 걱정된 얼굴로 노크를 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침대엔 아프다던 그가 없었다. 걱정은 더 커졌고 놀라서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집사 앞에 류호가 태연하게 넥타이를 메면서 나왔다.

               어....작은 어머니....

               너 아팠다면서...오늘은 쉬지 그러니?

               아니...이제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며 아닌척 했지만 류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니 꽤 오랫동안 앓은 흔적이 보였다.

               그럼 오늘은 내 차로 가자꾸나...너 아직 운전은 무리야....

               그럴께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여린 그녀의 간절한 청에 그는 작은 미소로 안심시켰다.

               사장님....괜찮으십니까...?

출근하자 최실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역시 작은 미소로 대답을 해 준 그는 무거운 발을 옮겼다.

               저....사장님....

               네?

               함제시씨...

               네????

               오늘 출근 안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은 류호는 온 몸에서 피가 빠지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겨우 문은 열었지만 책상 위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새하얀 봉투...어느정도는 예감 하고 있었지만....그는 그 봉투를 집어들고선 바로 감정실로 달려갔다.

               사..사장님....

               함제시.....그 사람은요...?

애석한 얼굴로 둘은 대답 대신 그녀의 정돈된 책상.. 그 위에 조심스레 박스 하나를 올려 놓았다.

               어? 오빠?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거야?

또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느긋하게 감정실로 들어서던 안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팔짝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가 이마에 나는 식은땀을 정성스레닦아 주었지만 류호의 눈엔 지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시의 책상 위에 놓여진 박스에 손을 얹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머무르다 갑자기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리둥절 안나는 그를 애타게 불러봤지만 이미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차를.....

주차장에 들어선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경비실로 향했다.

               사장님...!!

               저기...회사 차 키 좀 주세요...

               네..여기 있습니다...

그는 왠만해선 사용하지 않던 회사 예비차를 몰고 제시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장에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봉이를 보고선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집 앞에서 또 다시 주저 앉아버렸다.

               친구...그 친구...전화번호가.....

그는 핸드폰의 주소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름이....이름이.........

또 다시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누구세요??

               저...죄송합니다만....함제시...

류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문아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사장님?

               혹시...그 사람 연락 없었습니까??

문아는 류호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일단 들어 오세요...보경아...여기 물 좀 가져와 봐....

               그 사람....오늘 회사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무슨 연락이라도...

               아니요..저번 주에 첫 월급 탔다고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요...?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은 보경은 물 한잔을 들고 나오면서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좀...힘들어 보이긴 했어요....무슨 일 있었죠? 사장님?

               다 저 때문에...

더 이상의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 된 듯 허망감에 류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제서야 두 사람도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 사람은 함께 제시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깨끗해....

               이 녀석...멀리 간 거구나...

               어? 근데 구름이는 안 데리고 갔네?

모두의 시선이 제시의 침대 위에 덩그라니 놓여 있는 그 푸른 곰에게로 향했다.

               이건....내가 운이에게 사줬던 그 곰....

류호가 그 곰인형을 들어서 인형의 옷을 들췄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류운아....아프지마....

                                             사랑하는 형 류호가......

 어리둥절 서로 쳐다만보던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천류운..천류호....두 사람......잊고 있었어.....

              어쩐지....그 녀석...사장님 말만 나오면 신경질적이더니만....

              다 저 때문에 생긴 일이예요...그 사람..어디 간거죠? 혹시 아시면...

              사장님...그냥 두세요....제시...얼마나 힘들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우린 사장님한테 들이밀었으니...이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 동안의 제시의 의문적이던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된 문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시의 침대에 주저 앉아버렸다. 류호 역시 그녀가 받았을 고통이 전해 온 듯 그 곰인형을 꽉 쥐었다.

              사장님이 운이 형인건 놀랄 일이예요...하지만....이게 문제가 될까요?

              보경아...!!

              장문아!! 잘 생각해...함제시 그 꼴통이 운이 간 후로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어.....사장님....?

              네...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거 잘 알아요...지금...모든 걸 다 아셨는데....그래서 말인데요...

              혹시...제시에 대한 마음......바뀌셨는지 알고 싶어요...

복잡스런 심경을 들키고 싶지 않은 류호는 보경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솔직히 지금....저도 제정신이 아니예요....지금 당장은 무슨 말도

              할 수 없는 저를 이해해주세요...

              그러죠...당연하죠....보경아..이제 그만....

그의 대답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을지 몰라도 다혈질의 보경에겐 비겁한 변명으로 들렸을까...문아가 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제시한테서 연락 오면 알려드릴께요...사장님...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이제 돌아가시죠...

류호는 아무 잘못도 없는 애꿋은 곰 인형만 꽉 쥔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가장 이성적인 문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원망스런 곰 인형을 침대에 내려놓고선 제시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회사로 다시 돌아왔다.

              사장님....함제시씨...

최실장은 류호가 들어오자마자 기회를 잡은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잔뜩 지친 그의 손짓 하나에 상황 종료..

              죄송해요...그 일이라면 잠시 접어두죠....부탁드려요...최실장님..

              네...? 네...알겠습니다....

              그리고 안나...아니 됐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거래처 다녀와서 바로 퇴근할테니

              최실장님이 마무리 좀 해주십시오...

류호는 방에 들어가서 서류를 챙겨서 바로 다시 나가버렸다.

              오빠..아직 안 왔어요?

              죄송합니다만 방금 거래처 가신다고 나가셨어요...이제 그만 사장실 드나드시죠?

              왜 이래? 이제 그 여자도 없는데 내가 수석 자리에 앉을건데....이래도 되나?

              정말 죄송스럽습니다만...함제시씨가 사라졌다고해서 안나씨가 그 자리에 앉을거란

              기대는 하지 마시죠? 당신은 이미 저번주로 아웃 됐으니깐....

최실장은 엄지를 치켜 세우더니 자신의 목에 그으며 샘통이라는 듯 비웃음 가득한 표정까지 지으며 안나를 놀렸다.

              너...!! 감히 내가 누군데...

              누구? 쥬얼리 HAN의 감정실 수습사원...아...저번주부로 해고...아무것도 아니지..?

              감히 날 놀려...? 내가 널 가만 두지 않겠어...

              어쩐다...지금은 사장님이 너보다 날 더 신뢰하는데...?

씩씩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안나...그걸 잔뜩 놀리는 최실장

              너...!!!

              이게 무슨 짓들이야?? 사장실 앞에서...!!!

              아...부사장님.....

거만했던 최실장도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던 두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자 고개부터 숙였다.

              최실장....사장님 아직 소식 없으시나??

              아닙니다. 방금 들어오셨다가 거래처 가신다고 나가셨습니다...

              그래...알았어...안나...넌 당분간 회사 나오지 마라..!

              부사장님....!!! 어떻게..저에게....

              지금 함제시...도 갑자기 퇴사하고 너까지 사장님 힘들게 하면 안된다...

              하지만...

              그만!! 이번에도 내 말 어긴다면 바로 네 아버지께 말씀 드리겠다..알겠지?

둘의 꼴불견을 못마땅하게 보던 부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사장님...나오셨어요...?

              네...어제는 별 일 없었죠?

              저....부사장님께서 안나씨도 내보내셨습니다만...

              그래요..? 부장님들이 고생하시겠군요.....

              함제시씨 사표 처리할까요?

              아니요....

힘없이 대화를 나누던 류호가 제시의 말이 나오자 갑자기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눈치빠른 최실장에게 들킨 것 같은 생각에 얼른 그는 적당히 둘러 댈 대답을 나름 타당성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그 사람..능력있는 사람이예요...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예요...제가 무슨

              말 하기 전까진 당분간 보류하세요...

              아...네....알겠습니다...

더 이상 표정관리를 할 수 없게 되자 류호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런....많이 힘들었나봐.....우리가 그런줄도 모르고...

              그러게나 말일세...또 다시 우리 둘만 남아버렸군....

두 부장은 텅빈 제시의 책상을 바라다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같아?

              집은 분명 아니구....거긴 사장님이 다 아시니깐..

              그럼 어디지...? 그 녀석 아무데서나 자고 그러지 못하잖아....

              그러게...혹시....고모...?

              야...제시 비행기 멀미 하는 애가......그럴 수도 있겠다.....

말도 안된다는 눈빛으로 보경을 보던 문아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화 해보자...우리 여름에 고모집에 놀러 잘 갔잖아.....번호가....

              진정해...장문아..!!

              그래...찾았다!

              잠깐만...

보경이 바로 전화를 걸려던 문아의 손을 붙잡았다.

              왜..?

              우리까지 피할지도 모르는데..무작정 전화해서 뭐라고 할건데..?

              그냥....잘 있나....그것만.....

              너 바보냐? 그냥 둬...지금 사장님이 눈 빨갛게 되서 찾고 다닌 거

              아는 앤데..우리가 전화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어?

              아..진짜.....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너같음 안그러겠어? 근데...제시도 사장님 좋아하나봐....

              좋아하는 애가 이렇게 잠수타냐?

              너 정말 몰라..? 운이 가고 나서 어디 남자한테 눈길 한 번 주던 애야?

              그건....그렇지만.....밤도 함께 보냈다는 건....

              어쩐다..정말.....이 사실을 사장님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 다 알아버렸는데...

              차마 동생의 아내를.......

              그건 말도 안되지...!

              장문아!! 운이 떠난지 지금 얼마나 오래됐는데...아직도....

              하지만 제시는 엄연히 운이 아내야...

              됐다....사장님도 너 같은 생각 가지고 계신다면...우리 제시 불쌍해서 어쩌니...

꽉 막힌 남자라는 생각밖에.....보경은 한숨을 내쉬면서 문아와의 대화를 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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